[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 백암 아트홀에서 경험한 동화 같은 이야기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가 삼연으로 재빠르게 돌아왔다. 초재연은 대학로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올해 공연은 삼성역에 위치한 백암아트홀에서 진행되는 관계로 분위기가 색달랐다. 진 웹스터가 집필한 동명의 원작 소설을 섬세하고도 다정하게 무대 위에 재현해 냄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따뜻함이 감동적이었다. 


고아원에서 생활하던 제루샤가 키다리 아저씨의 후원을 통해 학교를 다니면서,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야기가 단 한순간도 눈과 귀를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오래도록 원했던 낯선 세상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 제루샤의 통통 튀는 문장력으로 가득한 손편지가 두 배우의 연기와 노래를 통하여 생생하게 보여지는 시간들이 좋았다. 


편지를 작성하는 제루샤 못지 않게 편지를 받는 제르비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 역시도 흥미진진했다. 제루샤의 비중이 압도적인 작품이긴 하지만, 제르비스의 움직임 또한 확인하지 않으면 놓치게 되는 부분이 많기에 감각의 전부를 오로지 둘에게만 집중시키며 바라봤던 찰나이기도 했다. 




제르비스가 제루샤를 찾아낸 게 우연이 아니었던 건, 그녀의 편지 속에 담긴 문장들이 말이 되고 노래가 되어 귀에 들려올 때마다 맞닥뜨리게 되는 단어 구사력이 감탄사를 자아냈기 때문이었다. 상황의 설명과 묘사가 적절할 뿐만 아니라 글로 써내려간 모든 날들이 머리 속에서 장면으로 재생되는 기분이 들어 신기했다. 


학교의 다른 친구들보다 지식은 부족할 수 밖에 없었지만, 작가의 꿈을 간직한 친구답게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재치가 넘쳤기에 이로 인한 매력이 편지글 형식과 잘 맞아 떨어져 아름다운 공연으로 완성됐다고 생각한다. 


한 달에 한 번씩 편지를 보내야 하나 후원자의 정체에 대해 알려고 해서는 안 됐기에 제루샤의 호기심은 극에 달했고, 이로부터 시작된 긴장감이 활력을 더해 재밌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제루샤가 제르비스의 생김새를 추측하던 때와 그를 키다리 아저씨로 부르게 된 이유 또한 만나게 돼서 즐거웠다. 


편지를 받게 된 주인공이 편지를 쓴 이에게 이끌려 자신의 원칙을 하나 둘씩 바꿔 나가던 과정도 볼만 했다. 이와 함께 제루샤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달라지던 제르비스의 감정 변화 역시도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공연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극이 이어져 나갈수록 제루샤의 성장이 제대로 잘 드러났다는 거다. 학업 성적은 물론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및 스스로의 가치관을 체계적으로 확립해 나가는 시간들이 매력적이었다. 2학년이 되었다고 1학년 학생들을 귀여워하던 모습도 앙증맞았다.


서로의 의견이 엇갈려 야기된 갈등을 겪었던 사건 이후로는 후원자의 강압적인 명령에 따를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방향을 선택해 나아가던 모습도 최고였다. 키다리 아저씨의 후원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돈을 벌 능력이 생기자 천천히 갚아 나가기로 결심한 장면에서도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어 인상적이었다.


여성에게는 참정권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임에도 주체적인 면모를 표출하며 당당히 자신의 길을 갈 것을 선언한 제루샤의 성장기가 아름다웠다. 덧붙여, 이러한 과거의 얘기가 단순히 소설 속 허구가 아니라 현실이었다는 점이 굉장히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도, 제루샤와 같은 여성이 없지 않았기에 다행스러웠다. 녹록치 않은 삶 속에서도 행복의 비밀을 발견해 나가던 소녀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CAST] 

제루샤 애봇 : 강지혜

제르비스 펜들턴 : 성두섭


이날 관람한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의 제루샤는 강지혜 배우, 제르비스 펜들턴은 성두섭 배우가 맡아 열연을 펼쳤다. 공연 속 막내 페어로 가장 많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기에 공연장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강루샤 특유의 맑은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청량감 그 자체였다. 대사를 칠 때도 좋았지만, 노래 부를 때의 청아함이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강점으로 여전해서 만족스러웠다. 이와 함께 손끝으로 치마를 살짝 잡고 인사를 하던 디테일이 기억에 남는다.


두섭 제르비스는 제루샤에게 온 편지를 책장에 삐뚤게 고정시켜 놓는 모습이 캐릭터와 잘 어울려서 흡족했다. 그리고 편지의 내용에 따른 감정 표현을 온 몸으로 드러낼 때마다 유쾌함을 선사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연기와 노래의 밸런스가 좋았던, 철부지 스윗가이! 


둘의 케미도 훌륭했는데, 특히 제루샤와 제르비스가 함께 노래할 때의 화음이 환상적이었다. 오래도록 귓가에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동화 같은 이야기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결말을 전하며 관객들에게 행복의 메시지를 전했다. 여러 개의 상자 안에서 마법처럼 튀어나오는 소품들로 인한 장면과 분위기의 전환만으로도 충분했던 무대의 활용도 독창적이었다.


원작을 새로운 장르로 탈바꿈시킴에 있어 완벽함을 보여줬던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는,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와 함께 탄생된 넘버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밝힌다. 


시대의 현실을 접목한 동화였기에, 마냥 판타지를 떠올리게 되는 작품은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공연이었다. 동화는 끝이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루샤의 미래는 그녀가 원하는대로 흘러갔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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