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팬레터 :: 삶을 구원하는 문학, 영원한 뮤즈를 향한 고백

뮤지컬 <팬레터>는 꽤나 오랜 시간 이어진 창작뮤지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게 도와준 사막 속 오아시스와 같은 작품이었다. 리딩 공연으로부터 시작돼 해를 거듭하며 무대에 오를수록 성장하는 작품을 만나는 일은, 때때로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기쁨을 안겨준. 이 작품은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매력적으로 혼합됨으로써 펼쳐지는 이야기를 통해 기대 이상의 재미와 놀라움을 선사했다.



문학은 삶을 구원한다. 그 반대의 경우 또한 존재하지만, 이 또한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문인들로 구성된 칠인회 멤버들이 글을 써내려갔던 이유 역시 마찬가지. 존경하는 김해진 선생과 팬레터를 주고받은 이후, 그들을 돕는 일을 하며 작가 지망생의 꿈을 이어나가게 된 세훈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성시대의 실존인물을 등장시켜 사실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흥미로운 전개를 위해 제작진이 선택한 비장의 카드는 바로 뮤즈였다.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를 뜻하는 단어로, 뮤즈는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과 학문의 여신으로 유명하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꼭 한번 만나기를 갈망하나 누구나 뮤즈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예술가에게 있어 뮤즈란 신과 동등한 위치를 지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해진은 세훈의 뮤즈로 그를 살게 했지만, 해진에게는 히카루라는 이름의 뮤즈가 자리를 잡은 채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뮤지컬 <팬레터>는 해진을 사이에 둔 세훈과 히카루의 대립이 기상천외하게 흘러가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김환태 : 권동호 / 이윤 : 정민]



세훈, 해진, 히카루의 관계가 얽히고 설키는 와중에 긴장감을 적절히 이완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한숨 돌리게 해주는 데에는 칠인회 멤버들의 공이 매우 컸다. 소설가와 시인 사이에서 유일하게 평론가의 길을 걷던 김환태의 모습 역시 눈에 띄었는데, 권동호 배우의 묵직한 저음은 대사를 내뱉을 때 뿐만 아니라 노래를 할 때도 귀를 사로잡으며 입지를 공고히 다지게 했다.


이윤은 냉철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겸비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사건 이면의 진실을 파헤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며 극의 꼬여버린 실타리를 풀어내는 해결사로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었다. 시인이자 소설가로 이름을 날린 이상을 주인공으로 탄생한 캐릭터다운 면모가 특히나 돋보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세훈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의 실력을 인정하던 장면에선 절로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정민 배우가 보여준 이윤의 다정함이 마음을 울렸다. 




[이태준 : 양승리 / 김수남 : 이승현]



학예부장 선생님 이태준은 칠인회의 리더로 문인들을 카리스마 넘치게 이끌어 나가며 문학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눈부셨다. 세훈이 가장 좋아하는 문인이 누군지 말하기를 주저하자 열매를 따주겠다며 기둥을 나무 삼아 점프를 하던 순간에는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양승리 배우의 캐릭터 표현도 좋았다. 


지난 공연까지 원캐스트였던 김수남이 올해는 더블 캐스트로, 그리하여 이승현 배우가 새로이 합류했는데 이로 인해 색다른 분위기가 전해지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넘버 소화할 때 은근히 샤우팅을 뽐내던 찰나로 인해 귀가 행복해지기도 했다. 참고로, 김수남의 모티브는 시인 김기림이다.




[히카루 : 조지승]


여류작가로 해진의 내면에 존재하는 깊은 감정을 알아챈 유일한 인물, 히카루. 그녀는 편지를 주고 받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심장박동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게 만들었던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당당하고 저돌적인 성격이 소설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매력적이었으며, 선과 악의 위험한 줄다리기를 즐기는 것이 아슬아슬함을 선사해 스릴감을 접하게 도와주기도 했다.


조지승 배우의 히카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울림이 쉽게 깨져버릴 유리 같은 위태로움과 무난한 고음 소화를 통한 안정감을 동시에 경험하게 해주었고, 1막과 2막의 의상이 달라짐에 따라 마주할 수 있었던 감정 대비와 캐릭터의 변화가 인상적이었다. 감춰져 있던 내면의 폭발이 타오르는 불꽃으로만 그치지 않고, 엄청난 빛의 포화로 말미암아 적막한 어둠까지 접하게 해준 점이 히카루답게 느껴졌다. 




[김해진 : 김종구]


김해진은 소설가 김유정을 모티브로 만들어졌고, 그가 집필한 '생의 반려' 또한 작품 속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기에 미리 읽어본 이들이 공연을 봤다면 훨씬 더 재밌지 않았을까 싶다. 히카루의 편지에 녹아나는 글자의 생명력으로 인해 살아갈 수 있었던 인물로 유약해 보이지만 강함을 지녔던, 문학에 살고 문학에 죽었던 진정한 문인이었음을 절로 깨닫게 해주었다.


김종구 배우의 해진은 날이 갈수록 몸이 꺼지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만은 놓을 수 없음으로 인해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갔기에, 그래서 더 마음에 오래도록 남을 캐릭터였다. 이날 공연 속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던 넘버는 '아무도 모른다'였는데,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슬픔을 알아봐주는 이가 나타나게 된다면 우리 역시도 해진과 같은 처지에 놓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히카루야말로 해진의 뮤즈가 될 수 밖에 없었음을. 



연기도 노래도 언제나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배우로 역시나 만족감을 자아냈는데, 이날따라 히카루에게 보낼 편지 봉투를 봉하기 위에 혀로 침을 묻혀가며 열심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편지는 제대로 봉해지지 않았고, 이윤에게 끌려 문 밖으로 나가면서도 그것이 걱정됐는지 잘 붙여서 보내라고 세훈에게 다짐을 두던 모습에 웃음이 빵 터졌다. 



[정세훈 : 문태유]


작가 지망생의 예측 불가능한 행보가 이야기의 모든 것을 아우르던 뮤지컬 <팬레터>. 그 속에서 문태유 배우의 세훈은 단연 돋보였고, 깊이있는 연기와 노래를 통해 중독성을 발휘했다. 아담한 체구에서 보여지는 소년다운 이미지가 오히려 단단함을 포착하게 도왔고, 시간이 갈수록 기쁨과 슬픔에 더해지는 분노와 절규가 안타까움을 확인하게 했다.


차오르는 슬픔의 감정에 복받쳐 겨우 토해내던 '내가 죽었을 때'의 첫 소절에는 마음이 미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을 사랑하고 문인을 애정했던 소년의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굴곡을 통해 그를 성장시켰기에, 계속해서 오래도록 세훈이 가는 길을 지켜보고 싶어졌다. 





종구 해진과 태유 세훈의 케미는 완벽했다. '해진의 편지'에서 해진의 어깨에 내려앉은 꽃잎과 세훈의 머리 위로 살포시 자리잡은 꽃잎마저도, 진실 앞에 다다른 둘의 모습에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삶을 구원하는 문학과 영원한 뮤즈를 향한 고백이 하나가 됨으로써 완성된 이야기는 슬프지만 아름다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굉장히 잘 만들어진 창작 뮤지컬인데 스토리도 나쁘지 않지만 음악이 전하는 힘을 통하여, 그 여운을 굉장히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살아가게 해준다는 점이 감명깊게 와닿은 것도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수줍음 많은 데다가 순진무구함으로 똘똘 뭉친 세훈과 당돌함으로 무장한 히카루. 그들은, 겉으로 꺼내놓을 수 없어 마음 속에 숨겨둔 내면의 진짜 감정과 겉으로 표출되는 외면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대담한 이야기를 써내려갔고, 그리하여 멋진 한 편의 이야기를 맞닥뜨리게 했다. 


마냥 충격적이라고 여겨지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만드는 스토리의 강점이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인생을 좀 살다보니, 마냥 비현실적인 느낌은 들지 않더라. 







세 사람에겐 문학이 구원이었듯이, 나에게 현재 구원이 되는 것은 예술이다. 반대의 상황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행복하지 않을까?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어 끝을 향해 다가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동국대학교 이해랑 예술극장의 초연을 시작으로, 재연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조금 더 넓은 공간에서 올려짐에 따라 무대 또한 변화가 있었고 훨씬 더 화려함으로 가득찼던 뮤지컬 <팬레터>와의 시간은 그때와는 또다른 분위기와 감동으로 관객들을 웃고 울렸다. 


다만, 오른쪽에 설치된 계단과 2층 공간은 그다지 쓰임새가 많지 않아 고개가 갸우뚱거려질 때가 있긴 했다. 그리고, 2층 방의 문은 눈에 들어오는 직사각형의 생김새가 아닌 굉장히 독특한 모양으로 열렸다가 닫혀서 궁금증을 증폭시키던 때도 존재했다. 





커튼콜의 마지막 즈음, 사진에 담겨진 학예부장님의 손가락 하트 또한 잊지 못할 것이다. 입술을 앙다문 채로 두 손을 꼭 쥔 문세훈의 모습도. 그는 그 순간,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훈과 히카루가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퇴장하던 모습에도 덜컥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날은 공연 보는 내내 감정이 왈칵 차올랐던 때라서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안녕...나의 빛, 나의 악몽.

그리고, 해진 선생님."





뮤지컬 <팬레터>는 공연의 막바지에 가까워질수록 전석 매진이라는 기염을 토하며 자리잡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워졌었다. 나 역시 겨우 그런 이유로 한 번 관람했을 뿐인데 그래서 그날의 공연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올해 겨울에 막을 내린 공연이지만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 진출을 통해서도 흥행 몰이를 이어가고 있는 만큼, 삼연 또한 빠르게 돌아올 것으로 예상되는 바, 생각보다 기다림은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너무 많이 슬퍼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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