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 쉽지 않은, 그러나 알고 싶은 두 사람의 이야기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는 소설을 무대에 옮겨 놓은 작품으로, 반정부주의자 정치범 발렌틴과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수감된 몰리나가 감옥 안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전혀 다른 세상을 살던 두 사람이 하나의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시간이 지날수록 마주하게 되는 감정의 파동은, 낯설음에서 어느새 서로를 향한 이해와 애정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공연은, 감방에서 지루하게 반복되는 현실을 잠시나마 잊고자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한 편의 영화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재미를 선사하면서 쉽지 않은 스토리 전개에 힘을 실어주었다. 가석방을 위해, 감옥 소장으로부터 발렌틴에게 정보를 빼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몰리나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관계에 진전이 생기자 발렌틴은, 몰리나가 석방될 것이라는 소식에 감춰두었던 동료들에 대한 얘기를 꺼내며 도움을 청하려 한다.
원작소설에선 몰리나로 인해 굉장히 다양한 소재의 영화를 만나볼 수 있는 것에 반해, 연극에선 오로지 하나의 작품에 집중해 흐름을 이어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책보다 쉽게 곁으로 다가와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도 의미있게 여겨졌으며, 배우들에 따라 달라지는 극의 묘미 또한 볼만 했다.
책을 읽었고, 공연 역시 첫 관람이 아니었기에 보다 와닿는 부분이 더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두 사람의 심리 변화가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마찬가지.
[발렌틴 : 김선호]
김선호 배우의 발렌틴은 한층 더 성숙한 모습으로 무대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만난 첫 번째 발렌틴이었는데 이제 두 번째 발렌틴까지 겸하게 됐고, 예전보다 깊어진 연기에 빠져드는 것이 가능해 뿌듯함이 절로 밀려왔다. 몰리나를 받아들이게 됨에 따라 마음을 터놓고 불안함에서 헤어나와 편안함을 마주하는 순간 또한 인상적이었다. 무뚝뚝했던 어리숙함이 리더십 넘치는 부드러움으로 그를 감쌌다.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헌신적으로 자신을 대하는 감방 친구의 진심을 알아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염려하는 모습에서 따스함이 내비쳐 다행스러웠다.
[몰리나 : 김호영]
김호영 배우의 몰리나는 극을 이끌어나가는 주인공과 다름 없었다. 원작을 어렵지 않게 풀어내긴 했으나 진중한 분위기가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없지 않았는데, 이때마다 특유의 재치를 발휘해 긴장감을 해소시키며 자신만의 매력을 한껏 드러냈다. 깨알같은 유머 발산을 통해 느슨함을 유도, 늘어짐 없이 공연에 끝까지 몰입하게끔 도왔다.
몰리나의 입을 통해 전해지던 영화 얘기도 감칠맛이 더해져 흥미진진했다. 그러므로, 이날 공연의 일등 공신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했던 우리의 친구.
선배가 이끄는대로 후배가 잘 따라와줘 이로 인한 밸런스가 잘 어우러진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를 맞닥뜨리게 돼 공연을 보고 나와서도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강약 완급 조절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정말 재밌는 극과의 시간을 함께 해서 행복했다. 이렇게 재밌는 극이 될 수도 있구나 싶어서.
제목 속 거미여인의 의미와 두 사람의 결말 역시 하나로 합쳐져 이로 인한 여운 또한 마음에 남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롱런의 이유와 가치가 충분한 연극이었다.
"그럼 이제 네가 나한테 약속해.
사람들이 너를 존중하게끔 한다고. 누구도 너를 이용 못하게 한다고
약속해, 너 자신을 절대 폄하하지 않겠다고."
이와 함께, 내 마음을 두드렸던 명대사는 바로 이거였다. 우연히 스치듯이 어디선가 본 듯한 문장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것이 <거미여인의 키스>에 담긴 내용인 줄은 이제서야 깨닫게 돼 다소 충격적이었다.
이제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의 대화가 머리 속에 콕콕 박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 깊이 스며들어 잊지 않게끔, 몰리나를 향한 발렌틴의 말을 기억하려 한다.
침착하게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호영 몰리나와 달리, 행복한 듯 웃음짓다 눈물을 보이는 선호 발렌틴의 마지막 표정도 이 시간을 담아두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앉은 위치에 따른 조명의 차이도 선명해서 이 점도 재밌었다.
내가 찍은 커튼콜 사진만 그런 것은 아닐 거라 믿어보며!
교도소장으로 목소리를 확인하게 해준 서현우 배우도 좋았다. 답답한 감방에서 맞닥뜨린 두 사람의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해졌기를 바란다. 참고로, 원작소설을 접하면 훨씬 많은 도움이 된다. 굉장히 자세한 설명이 빼곡하게 쓰여 있다.
다만 나는 좀, 완벽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몇 번 더 읽어봐야 할 듯 하다. 여전히,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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