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니싱 :: 경성을 뒤흔든 뱀파이어의 출현
경성을 뒤흔든 뱀파이어의 출현은 본인 스스로는 물론이고,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삶까지 바꿔버리면서 놀라운 세계 속으로 관객들을 안내했다. 이것은 뮤지컬 <배니싱>에 대한 이야기다.
흡혈의 욕구를 충족해야만 영생이 가능한 낯선 종족의 등장은 놀라운 일인 게 분명했지만, 오로지 의학적 연구에만 전념하던 한 청년에게는 어떠한 충격도 전해줄 수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 흐르는 피가 인류에 큰 도움이 될 것을 굳게 믿음으로써 새로운 실험에 박차를 가하게 했을 뿐.
의신이 케이를 만나게 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를 해부하기 위해 몰래 잠입한 폐가 주인과의 조우가 모든 것을 변화시키리라고는, 그 누구도 믿지 못했을 거다.
홀로 기나긴 세월을 살아 온 뱀파이어에게 케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햇살 아래를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의신의 연구가 파국에 치달으면서 맞닥뜨려야 했던 숙명은 그런 의미에서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자 내딛었던 발걸음은 처음부터 필요에 의해 이용되어 왔던 것이나 다름 없었던 게 아닐까? 둘의 관계를 연결시키는 인연의 고리를 따라가다 보면 도달하게 되는 결론 중 하나는 그래서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그저 단순한 이용이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함께 했던 시간 동안 둘은 서로에게 빛이자 어둠이었으니까. 스릴러처럼 보였던 공연이 어느새 각기 다른 존재의 깊은 우정으로 비춰지는 걸 보면 마냥 잔혹한 비극으로만 여길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공연을 관람하는 동안 시대적 배경을 굳이 경성으로 설정해야 했나 싶은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인데, 보다 보니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도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갔다. 뱀파이어의 존재 자체가 익숙치 않은 과거였기에 가능한 이야기로, 일제강점기 시대 속 식민지 조선의 자화상 또한 경성의전에 다니는 의신과 명렬을 통해 접할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건 그저 일부분일 뿐이고, 제작사가 경성 소재의 작품 제작을 좋아한다는 가설이 훨씬 더 와닿는다는 게 함정. 이름하여, 네오의 취향.
뭐 어쨌거나 시대물을 통해 마주하게 된 뱀파이어와 의학도들의 삶은 꽤나 흥미로웠다. 공연의 제목만 봐도 그렇다. 배니싱(VANISHING), 영원히 사는 인생이 아닌 불현듯 사라져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꽤 재밌었다.
[케이 : 김종구 / 의신 : 김도현 / 명렬 : 기세중]
지난 주 수요일 오후 4시, 평일 마티네 공연이 있어서 햇빛 쏟아지는 거리를 걸으며 공연장으로 향했다. 보고 싶은 캐스트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날짜를 조정하다 보니 이렇게 됐는데, 오래간만에 즐기는 마티네 공연이라 더 설렜다.
이날의 캐스트는 특히, 저마다의 개성이 뚜렷해서 이로 인한 볼거리가 풍부했다. 배우들의 표정과 더불어 시원한 가창력 또한 경험할 수 있어 의미있는 하루였다.
세중 명렬은 믿었던 의신이 비밀리에 연구를 진행하자 의구심과 배신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에는 형 몰래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부와 명예를 얻고자 했던 비열함이 두드러지는 캐릭터였다. 이러한 감정의 물결이 시간이 갈수록 얼굴 표정으로 대놓고 드러나서 공포감이 엄습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특히, 의신이 수술을 집도해야 하는 환자를 눈 앞에 두고 괴로워하며 말을 이어갈 때 은근하게 소리없는 비웃음을 표출하던 순간이 압권이었다. 자신을 방해하는 것들에 폭발하며 통화하던 도중에 내지르던 큰 소리로 분노하던 장면도 기대 이상이었다. 캐릭터의 풀네임은 윤명렬이지만 이보다 입에 착착 붙는 기명렬으로 불리던 그는, 이름값을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노래 부를 때의 저음이 참 좋았다.
이날은 의신의 연구를 위해 사용되는 테이블도 눈에 들어와서 배우들이 자리를 잡는 동안에 한컷 담아봤다. 현미경과 의학서적, 연구일지, 의신이 제조한 약과 주사기 등등이 눈에 쏙 들어왔다.
종구 케이는 처연한 뱀파이어로 애처로움을 자아냈다. 의신을 만나게 되면서 달라지는 말투와 변화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오래도록 어둠 속에서 방황했던 그에게 다가 온 운명같은 맞닥뜨림이 전해 준 일말의 희망을 붙들고 싶었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축배를 권한 의신 모르게 입에 머금었던 술을 고이 컵 안에 뱉어주는 배려까지!
다만, 이날 '나를 마셔'를 부르는 도중에 가사 실수가 있어서 완벽한 공연을 펼쳤다고 보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목이 좋은 상태는 아닌 것 같았는데 하필이면 또 중요한 순간에 작사를 시전해서......새로운 곡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커튼콜에서 인사를 하는 동안 꽤 오래도록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짠하면서도 안타까웠던 찰나였다. 하지만 실수한 건 맞으니까ㅠㅠ
도현 의신은 의학도답게 자신의 학문에 푹 빠진 디테일이 가장 잘 살아나는 면모를 보여줘 단숨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콜레라에 대한 설명도 그렇고, 케이에게 들려주는 연구 결과에 있어서도 전문용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손짓을 섞어가며 쉬운 표현을 찾아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브이 인자 설명하기에 앞서 두 주먹을 꼭 쥐어보라며 케이에게 잼잼을 시키던 장면에선 미소가 터져나왔다.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얘기가 키포인트가 아니었나 싶다. 케이를 품에 안을 때도 머리를 손으로 받쳐주며 편안함을 유도하던 모습에서도 센스가 느껴졌던 김의신이었다.
도레미 인사에 이어 관객들을 향한 박수로 이어졌던 커튼콜. 여기서 기명렬이 객석 전체를 향해 방향을 바꿔가며 박수를 보내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이와 함께, 커튼콜의 마지막에 다다라 퇴장하던 도현 의신도 눈여겨 볼만 했다. 본인의 차례가 되어 무대에 입장할 때 실험실에 놔뒀던 안경을 착용하고 인사를 하더니, 계단을 올라가 사라짐을 행동에 옮길 차례에서는 다시 안경을 벗고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며 자취를 감추었다.
영원히 사는 게 좋아 보이는 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케이가 "시간을 선물했어. 어둡고 긴..."이라는 대사를 치는 순간이 때때로 섬뜩하게 다가왔다. 은유적인 표현이 멋스럽긴 한데 당사자 입장에서는 비극일 테니까.
덕분에, 뮤지컬 <배니싱>으로 인해 한번 더 삶과 죽음을 곱씹어 보게 됐다. 살아있는 동안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사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그래야만 후회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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