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 :: 어둠의 숙명 앞에 선 소년의 일대기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이 서울예술단에서 선보이는 창작가무극의 새로운 레퍼토리로 무대에 올랐다. 박지리 작가가 써낸 동명의 원작소설을 좋아해서 생각날 때마다 찾아 읽었던 만큼, 소식을 듣자마자 기대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공연이 개막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막이 열렸고, 직접 관람해 보니 예상을 뛰어넘는 재미와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지금은 벌써부터 재연이 오기를 바라는 중이다. 초연이 마무리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돼 아버지를 지나쳐 결국 다가오고야 만 어둠의 숙명 앞에 선 소년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죄를 지은 채로 살아 온 영 가문의 계보가 살인사건의 실마리를 파헤쳐가는 시간과 맞물려 밝혀짐에 따라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관이 드러나 흥미로움을 자아낸 작품이었다.


삼촌 제이 헌터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루미와 함께 사건을 파헤치던 다윈이 그 속에서 아버지 니스와의 연결고리를 발견함으로써 맞닥뜨리게 된 진실로 인해 변화해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며 악의 시간으로 그를 이끌어 나갔다. 


이로 인하여 프라임 스쿨 우등생으로 탐구적인 자세와 해맑은 소년의 면모가 두드러졌던 다윈 영이 지금까지 구축해 왔던 자신의 세계와 결별하고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려왔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본인의 선택으로 죄의 길을 답습하게 된 소년의 처절함을 바라보며 나 또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죄로부터 비롯되는 악의 대물림을 끊어내지 못하고 받아들인 아이의 참담한 성장기가 그래서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 하다.



800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을 3시간이 채 되지 않은 공연으로 재탄생시켜야 했으므로 축약된 내용이 상당했다. 그런 이유로 원작을 만나고 갔더니 무대에서 접하지 못한 속 깊은 이야기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서 좋았다. 하지만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독특한 세상에 대한 감탄이 더해졌을 것이므로 큰 상관은 없어 보였다. 그저, 원작이 있는 공연의 경우에 미리 찾아보고 가는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 반영된 것이니까.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간발의 차로 책보다 어둠과 무거움의 분위기가 덜했고, 이와 동시에 원작에 있어 아쉬움을 느꼈던 부분에 각색이 이루어져서 이 점이 정말 만족스러웠다. 남학교였던 프라임스쿨이 남녀공학이 됨으로 인해 루미와 다윈, 레오가 같은 학교 학생으로 설정된 점, 교장 선생님 또한 여성이었다는 사실(김건혜 배우였음을 뒤늦게 알게 돼서 깜짝 놀랐다)도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책이 여성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았던 터라 공연 속에서 시선을 집중시켰던 인물은 루미가 전부였지만, 원작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나름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던 노력이 돋보여서 흡족했다.


무대 또한 자본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화려함으로 가득 채워졌다.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만든 회전무대와 자동차의 등장은 물론이고 기차씬의 구현은 깊은 몰입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서울예술단 특유의 군무가 비중이 적은 편이었음에도 합이 맞지 않아 안타까웠지만, 그것을 제외한다면 완성도가 높은 공연이었기에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장 좋았던 것은 공연의 서사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넘버의 항연이었다. 공연장을 흐르던 멜로디와 배우들의 목소리, 가사의 환상적인 조합이 최고였다. 서울예술단의 공연을 볼 때마다 넘버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존재했는데 이 공연을 통해 갈증을 해소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이와 함께, 프라임스쿨의 교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세련되고 예뻤다. 흔히 선과 악으로 대비되는 화이트와 블랙 컬러를 매치해서 제작된 의상은 볼수록 마음에 쏙 들었다. 주인공 다윈의 교복핏은 특히나 기대 이상이기도 했다. 자꾸자꾸 보고 싶어질 정도로.


프라임스쿨 다큐멘터리를 촬영한 레오의 아버지, 버즈의 부탁으로 내레이션을 맡게 된 다윈이 무대 위로 나타나면서 시작된 공연은 소년이 부르는 첫 넘버부터 눈물을 쏙 빼버리게 만들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담쟁이 덩굴에 가려진 프라임스쿨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여지던 찰나, 그 안에 존재하는 다윈의 목소리가 마음 깊은 곳을 울리며 이야기가 펼쳐졌다. 



[CAST]

다윈 : 최우혁

니스 : 박은석

레오 : 강상준

루미 : 송문선

버즈 : 금승훈

제이 : 신상언

조이 : 김백현

러너 : 최정수

그리고, 서울예술단 단원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제작 소식과 더불어 캐스팅된 배우들이 밝혀졌을 땐 내적 환호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고, 덕분에 공연이 더 완벽해졌다. 그러니까 재연에도 손 붙잡고 함께 와야 한다. 부탁하는 거예요! 



상위 1지구부터 하위 9지구까지 명확하게 나누어진 계급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감춰진 비밀, 과거 9지구의 후디들이 일으킨 12월의 폭동이 몰고 온 영 가문의 비극과 제이 헌터의 죽음에 관련된 의혹이 1지구 엘리트들과 이어짐으로써 확인하게 된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시대와 동떨어진 판타지로만 받아들일 수 없어 복잡한 심경이 더해지기도 했다.


9지구에 사는 이들을 후디로 명명, 자주색 후드집업을 착용한 모습으로 표현한 점은 책을 통해 문장으로만 읽어내려간 이야기를 눈으로 직접 마주보게 해줌으로써 상상력을 현실로 일구어내 보는 재미를 가중시켰다. 




니스, 제이, 버즈의 16세 학창시절을 보여주는 장면에선 제이의 동생 조이 역으로 아역 배우인 이윤우가 잠깐이나마 존재감을 경험하게 해줘 매우 반가웠다. 




16세의 제이와 16세의 러너는 동시대를 살지 않았으나 그로 인해 악연으로 묶여 벗어날 수 없는 인연의 끈을 손에 쥐게 된 케이스. 완전무결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만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죄를 심판하고자 했던 제이 헌터로 인해 세상은 뒤틀렸다. 친구들 사이의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 제이 앞에서 니스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이 모든 게 사실 어른으로 지칭되는 이들의 편협함이 불러 일으킨 결과라서, 10대의 시간을 훌쩍 넘겨버린 나는 아이들에게 미안해졌다. 



많은 관객들이 이 공연을 통해 상준 레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고 한다. 다윈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봤던 베스트 프렌드.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다고 믿던 레오. 다윈이 레오를 믿었더라면 아마도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탄생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원작에 비해 긍정적인 시선과 밝은 에너지가 온기를 전해주었던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다. 커튼콜에서 유일하게 교복을 갖춰 입고 나와줘서, 교복핏을 촬영하도록 해줘서 매우 고맙기도 하다. 



문선 루미는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만나는 동안 원작과는 다른 모습이 가장 만족스러움을 전했던 캐릭터였다. 다큐 촬영을 위해 학교를 거닐던 버즈가 루미에게 다윈, 레오와 같이 법학수업을 듣지 않는 이유를 묻자 "제 법은 제가 만들어요."라고 답할 때의 총명함이 잊혀지지 않고 뇌리에 깊이 박혔다.


뿐만 아니라 제이 헌터 살인사건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음을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다짐하던 루미는 눈이 부셨다. 더불어 사건의 진실을 찾는 것 또한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루미로 인해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에 이어지는 속편이 이어져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작과 다른 결말로 나아가는데 중점적인 역할을 맡은 루미 덕택에 공연만의 포인트가 살아난 점도 훌륭했다. 이로 인해서 악의 대물림이 끝나는 순간을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9지구의 후디로 태어나 1지구의 엘리트로 살아남게 된 러너 영의 삶은 기상천외했다. 희생양이 되지 않고자 모험을 하게 된 러너에게 벌어진 일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연민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니스가 과거에 결행한 일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인해 발생하게 되었으므로 평생 어둠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는 것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끊임없이 구토를 내뱉고 후드를 눌러쓴 채 자책하는 모습이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다 생각되지 않았다.


문화부 장관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더불어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로 아무런 결점이 없어 보이는 외적 모습과 다르게 끝없는 갈등과 번민을 계속하는 내적 혼란을 보여준 은석 니스의 열연은 마음 속으로 환호성을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근엄한 아버지일 때와는 달리, 학창시절 속 16세 니스는 귀여운 철부지였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오랜만에 노래하는 거 보니까 역시나 좋더라. 그리고, 은석 니스 뒷편 묘비에 새겨진 O.M.G는 커튼콜 촬영한 거 보다가 알게 됐는데 왠지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갔다. 






요건, 커튼콜에서도 아버지를 향한 애정이 담뿍 들어나는 아들의 모습이 예뻐서. 잊고 싶지 않아서 한 컷 담아봤다. 사이좋은 부자로,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니스와 다윈을 떠오르게 만든 장면이기도 하다.

 






우리 다윈! 공연의 타이틀롤을 맡은 우혁 다윈은 16세 소년 다윈 영 그 자체였다.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대할 때는 물론이고 아끼는 친구들을 위해 대화를 하고 활짝 미소 지을 때 특유의 빙구미가 아름답게 반짝여서 다윈의 순수함 속에 잘 녹아든 배우의 모습에 푹 빠져들고야 말았다. 다윈과 레오, 다윈과 루미가 함께 하는 장면도 매력적이었다. 


배우가 지닌 목소리의 색깔이 강한 편인데, 공연을 거듭할수록 강약의 완급 조절이 잘 되는 것이 느껴져 공연 내내 귀가 황홀했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캐릭터가 존재하는 공연에 출연하게 되면서 필모그래피 또한 다채로워져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적인 표현 또한 섬세하게 자리잡아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하나의 사건으로 변모해 나가는 캐릭터의 양면성이 입체적으로 살아났던 우혁 다윈이었다. 다윈 역으로 캐스팅된 걸 알게 됐을 때부터 딱 맞는 옷을 입었다 싶었는데 그는 역시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연기, 노래, 뭐 하나 빠지지 않았는데 1막 마지막 넘버에서 공연장에 메아리치던 샤우팅은 관객들이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 


결국 선택을 해 죄를 지은 채로 서럽게 울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두 손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흘리던 눈물과 소리없는 절규에 마음이 아팠다. 


16세 니스의 과거와 16세 다윈의 현재에 일어나는 사건이 하나의 프레임에 보여지던 연출도 강렬했다. 부전자전이라고 둘이 참 많이 닮았던데, 닮지 말아야 할 부분마저 똑같아서 슬펐다.





스토리는 원작을 중심으로 꾸며졌기에 괜찮았고, 뮤지컬의 강점을 극대화시키고자 넘버에 힘을 쏟은 것이 신의 한수였다고 생각된다. 배우들 목소리의 영혼을 갈아넣은 넘버는 칭찬 받아 마땅했다. 러너 영, 니스 영, 다윈 영의 삼중창 역시도 관객들의 눈물을 뽑아낼 만큼 절절했음을 밝힌다.


넘버의 멜로디 못지 않게 좋은 가사가 정말 많았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OST가 발매되었다면 좋았을걸. 대신, 총 6일 동안 9번의 공연이 전부였는데 1지구부터 9지구를 연상시키며 스탬프를 찍을 수 있게끔 재관람카드를 출시한 게 이례적이었어서 의외였다. 



결론적으로는 성공적인 초연이었으니 재연도 빠르게 만나볼 수 있을 거라고 믿어본다. 그때는 OST도 같이 왔으면 좋겠다. 출연진도 다같이 오는 걸 당연히, 잊어서는 안 되겠지. 


박지리 작가가 이 공연을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유작이 되었지만, 그녀가 남긴 작품이 이제는 대한민국 소설계를 넘어 공연계에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덧붙여,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이 서울예술단 레퍼토리 중에서 최애극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바다. 앞으로도 신작은 이렇게만 만들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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