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블라인드 :: 루벤의 손끝으로부터 시작된 세상의 아름다움, 그리고 사랑

연극 <블라인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원작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완벽하게 충족시켰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배우들이 확인하게 해준 열연의 힘과 음악적 분위기가 새로운 장르로의 개척을 도왔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각을 잃고 난 뒤, 홀로 어둠에 갇혀 날선 심장과 함께 살아나가야 했던 루벤에게 심신이 온통 상처투성이인 마리가 찾아오면서 교감하게 되는 진실한 감정은 우정에서 사랑으로 발전하며 둘을 하나로 이어준다. 


그러나, 아들의 눈을 뜨게 해주고 싶었던 엄마는 끈질긴 노력 끝에 시력을 회복하는 수술을 감행하고 그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불러 들였던 마리 역시 곁을 떠나게 만들며 원치 않는 이별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경험해야 했던 놀라운 결말은 충격적이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커서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객석의 통로로부터 무대를 향해 걸어나오는 마리의 등장은 신비로움과 더불어 윙거리는 바람소리와 함께 겨울의 쓸쓸함을 더해 주었다. 그리고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 암전된 상태에서 들려오던 그녀의 목소리는 루벤에게 읽어주던 책의 첫 문장과 같음으로써 잠시나마 관객 모두가 그와 같이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체감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삶의 안타까움을 마주하게 하며 공연의 의미를 전했다. 덧붙여, 작품의 전체적인 메시지 역시도 곱씹게 해주었음은 물론이다. 





루벤 : 이재균



여인 : 이영숙



마리 : 정운선



연극 <블라인드>가 초연으로 무대에 오르는 동안 총 3번을 관람했다. 그중에서 두 번의 공연은 커튼콜 데이라는 타이틀 하에 촬영이 가능했기에 사진과 리뷰를 동시에 남기는 바다. 첫 번째 관람은 프리뷰 공연 중 하루였는데 그래서인지 다소 산만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배우들은 참 잘했지만 여백으로도 충분한 장면이 대사로 채워져 있어 그 점은 좀 아쉬웠다.


공간의 이동을 보여주기 위해 무대에 설치된 나무 한 그루를 루벤이 앞쪽으로 친히 옮겨오던 모습에선 솔직히 웃음 밖에 안 났다. 마리를 집에서 떠나보내기 위해 그의 엄마가 토해내던 말들은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흔히 봐오던,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감을 대하는 예비 시어머니의 냉소적이면서도 거친 대사로 이루어져 있어 이 또한 어색했다. 이로 인해 결국에는 그녀가 떠나고자 객석 통로의 계단으로 발을 들였는데, 아까와는 달리 무거운 가방을 손에 쥔 상태에서 관객들 사이에 위치한 좁은 공간을 낑낑대며 빠져나가야만 했기에 그 순간이 보다 애처롭게 비춰졌다.



그럼에도 다시 관람하고픈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재균 배우가 보여준 섬세한 루벤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을 치는 것을 당해낼 수 없었던 바지에 이미 구멍이 나버린 게 눈에 잡혔다. 오랜만에 봐도 참 연기 잘한다 싶었는데, 처음부터 안 보였던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볼 수 있는 것이 자취를 감추자 겪어야 했던 상실감이 오롯이 드러나 마음이 아팠다. 


정운선 배우의 마리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스스로 단절을 택한 인물처럼 여겨졌다. 루벤이 원치 않는 단절로 괴로워했던 것과 다르게 그녀는 마음의 문을 철저히 닫아두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더욱 슬픔으로 가득 찬 분위기가 처절함과 맞닿아 있었다. 거침없이 날아오는 컵을 받아내고 고용주의 손길 또한 척척 막아내던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었다.


여인 역의 정영숙 배우는 엄마로 둘 사이의 긴장감을 조성했다. 특유의 애절한 목소리가 안쓰러움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 강해 보이려 하는 겉모습 뒤에 감춰진 연약함을 표출하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루벤 : 박은석



여인 : 김정영



마리 : 김정민



두 번째 관람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루어졌다. 프리뷰 때 실소를 머금게 했던 나무 옮기기와 불편함을 내포했던 여인의 대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방을 들고 객석 통로로 이동하던 장면도. 본 공연이 펼쳐짐에 따라 수정의 작업을 거친 것이 확실했다. 아, 그리고 결말 역시도 뒷모습이 아닌 정면을 향하게 됨으로써 메시지 전달에 힘을 쏟은 것이 만족스러웠다.


은석 루벤은 특유의 목소리가 캐릭터와 완벽한 싱크로율을 선보이며 몰입감을 높였다. 털모자 쓴 모습이 참 귀여웠고, 마리를 애타게 찾는 순간들은 절로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다. 눈이 멀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온전히 다정다감한 연인이 되어주었을 것만 같은 따뜻함이 언뜻 드러나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정민 마리는 정말로 목소리가 좋았다. 감정 역시 탁월했고, 책을 읽어줄 때의 목소리 톤이 자유자재로 바뀌어서 절로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상상했던 마리의 캐릭터 그 자체였다. 얼굴 상처 분장도 조금 달라졌는데, 이건 사실 별 의미는 두지 않으련다.


여인 역의 김정영 배우도 감명깊었다. 아들과 둘이 살면서 억척스러움은 물론이고 루벤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는 보호 본능이 강하게 와닿아서 흥미로웠다.


이날을 기점으로 전캐스트를 찍었는데, 은석 루벤과 정민 마리의 케미가 특히나 돋보였다. 




커튼콜에서의 눈빛 또한 어찌나 따스하던지! 눈에서 꿀 떨어지는 줄 알았다. 전캐스트의 커튼콜 촬영을 이렇게나마 할 수 있어 행복했던 연극 <블라인드>와의 시간이었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공연을 볼 때면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아도 돼서 몸이 편하고, 촬영이 되는 작품은 한 컷이라도 마음에 드는 찰나를 담는 게 가능해 각기 다른 매력에 빠져들게 되곤 한다. 




천으로 덮여 가려진 거울과 바닥을 뒹구는 물건들의 소용돌이가 한바탕 휘몰아친 겨울의 거친 바람과 눈보라를 연상시켰다. 무대 왼쪽으로는 3인조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가 실시간으로 들려오는데 그것이 연극에서 체험하기 힘든 영상미를 대신해 주는 듯해서 눈 대신 귀가 즐거웠다.


이 작품에서 거울의 의미는 진실한 사랑과 맞닿아 있기도 하지만, 또다른 소품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지니니 기억해 두어도 좋겠다. 영화와 다른 쓰임새를 보여줌으로 인해서 연극 <블라인드>를 기억하게 해주는 장치가 된 점도 인정!




연극 <블라인드>와의 마지막 만남은 전캐스트를 확인한 이후에 성사되었다. 궁금했던 페어가 생겨 보러 갔는데 역시나 잘하더라. 공연 기간이 많이 흐르다 보니 배우만의 디테일 또한 늘어서 그걸 보는 재미 또한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다시금 또 수정된 부분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던 사실 만큼은 씁쓸했다. 프리뷰 기간이 괜히 있는 건 아닐텐데 말이다. 


마리가 읽어주는 책을 집필한 안데르센에 대한 내용이 추가되었다. 딱히 없어도 될 것 같았는데, 대화를 가만히 듣다 보니 슬퍼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해 공연의 여백이 더 줄어든 점은 조금 아쉽기도 하다. 마리의 상처에 대한 내용을 유추만 해보게 한 점도 마찬가지.  



그러나, 이날 만난 재균 루벤의 디테일이 때때로 웃음과 눈물을 자아내며 심장을 울려 흡족함이 온 몸에 가득 퍼졌다. 그중에서도 지팡이에 입을 맞춘 뒤 침대에 가지런히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면 장면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듯 하다. 


배우들은 나날이 월등한 연기를 선사했다. 하지만 대본은 계속되는 수정과 보완 속에서 나아진 점도 존재하나 이전의 좋았던 부분도 사라졌기에 이것은, 공연이 끝나면 풀어야 할 과제로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만지는 것이 보는 거라며 눈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루벤만의 아름다운 세계는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낯선 공간에 대한 경이로움을 심어주며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하면서도, 일말의 두려움을 갖게 하며 선뜻 손을 내미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루벤의 손끝으로부터 시작된 세상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직접 느낄 수는 없겠지만, 블라인드라는 좋은 작품이 존재하기에 머리 속에서나마 그의 안녕을 빌어본다.


다른 건 몰라도 계절에 부합하는 공연이었으니, 초연의 의미가 크게 바래지진 않겠다. 스산한 겨울의 분위기를 점차적으로 체감하게 되는 요즘이라 그런지 연극 <블라인드>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도 아마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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