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 기억할게, 나를 있게 한 모든 순간을.

삶은 어쩌면,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의 넘버 '가짜 같은 세상에 진짜'에 담긴 노랫말과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 거짓말 같은 세상에, 진심 같은 가짜에, 거짓된 웃음들 속에". 그 속에서 살아가며 잊지 못할 기억을 쌓아가는 것. 언제든 꺼내볼 수 있도록.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초연된 땡베리의 여정도 이번 주가 벌써 마지막이다. 호평과 혹평을 넘나드는 작품이었지만 노인 여성의 서사에 초점을 맞춘 공연이 흔치 않았기에 이로 인한 존재감만으로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볼수록 눈물을 자아내던 엠마의 애틋한 기억찾기는 그런 의미에서 더없이 소중한 시간을 전해주었다.  



[엠마 : 정연 / 스톤 : 이율 / 미아 : 박지은 / 버나드 : 이상운]


정연 엠마는 소소한 디테일이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건네며 마음을 위로하는 캐릭터였다. 아무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밖으로 나설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홀로 살아가는 고집 센 노인으로 우역곡절 끝에 이루어진 스톤과의 첫 만남부터 구수한 욕을 내뱉으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와 함께 연령대를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연기의 명확성이 돋보였다. 노인이 된 현재와 과거의 엠마는 말을 할 때는 물론이고 노래를 부를 때도 차이점이 두드러져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스톤을 통해 잊고 있던 기억을 꺼내놓기 시작함에 서로가 조금 더 가까워졌을 때쯤, 엠마의 입가에 떠오른 행복한 미소와 그의 얼굴로 향하던 손길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장면은 스톤의 움직임이 멈추기 직전에 만날 수 있었던 상황인데, 이때 이루어진 정연 엠마만의 표현 방식이 마음에 쏙 들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이 생뚱맞게 느껴졌던 터라 배우만의 개성으로 변화된 장면의 분위기로 인한 흐름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비춰지기도 했다. 이와 함께 친해지고 나서는 감춰 두었던 애교까지 방출하던 엠마 할머니는 귀여움의 극치였다. 


율스톤은 여전히 따뜻하고 앙증맞고 애틋했다. 엠마가 놀라서 숄로 머리를 덮어버렸을 때 단숨에 해결하지 못하고 버벅대는 모습은 재밌었고, 격한 피아노 연주에 분노한 엠마로 인해 포박 당했을 때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날은 멱살까지 잡히는 상황이 찾아왔는데 나름대로 평정심을 잃지 않고 주인을 대하려는 모습이 좋았다. 잠든 엠마를 위해 피아노 연주와 함께 자장가를 불러주던 장면도 최고! 나도 요런 도우미 로봇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한데, 비매품이라는 사실이 슬퍼졌다. 



엠마를 연기하는 배우마다 스톤의 정체에 대한 해석이 다른 점도 주목해 볼만 하다. 이날 내가 마주한 정연 엠마에게 스톤은 실재하는 존재가 아닌 기억 그 자체로 보여졌다. 그래서 '가짜 같은 세상에 진짜'라는 넘버 제목 또한 스톤으로 말미암아 되찾게 된 기억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싱글마을에 사는 엠마의 곁에 머무르는 스톤 역시 기억의 일부분이자 그녀의 모든 것이지 않았을까 싶은.


엠마와 스톤이 마주 선 채로 자신들만의 인사를 주고 받는 장면에선 무대 위의 배우들 뿐만 아니라 객석까지도 눈물바다가 됐다. 발랄한 인삿말과 손짓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눈물 흘리는 둘의 모습에 절절함이 더해졌기 때문에. 특히,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애써 눈물을 참아 보려던 율스톤의 표정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정연 엠마와 율스톤 못지 않게 지은 미아와 상운 버나드도 훌륭했다. 덧붙여, 엠마가 버나드의 이름을 물으면서 기억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이로 인해 버나드 역시 예전과는 다른 존재감을 부여받게 된 것만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정연 엠마 디테일은 정말, 이야기를 해도해도 끝이 없는 것 같다. 완전, 디테일 부자! 



땡베리를 관람하는 동안 포스터 촬영을 함께 한 엠마, 스톤 페어를 만나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데 드디어 정율 페어를 영접할 수 있어 즐거웠다. 이날이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마지막 관람이었는데, 그로 인해 최애 페어를 찾게 된 것도 더없이 기뻤다. 


2층 좌석에선 처음 보는 거라 이로 인한 재미도 엄청났다. 1층과는 다르게 조명이 한눈에 바라다 보여서 그 아름다움에 반했던 한때이기도 했다. 눈물 콧물 범벅으로 지켜보다가 커튼콜에서 기립! 그 와중에도 눈물이 안 멈춰서 펑펑 울다 나왔다.



나를 있게 한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지게 만들었던 공연이었다. 다채로운 이벤트와 스페셜 공연까지 확인하는 게 가능해서 좋았는데, OST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잘 다듬어서 재연으로 또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다. 그때까지 초연 땡베리의 기억을 간직하며 살아갈 테니, 마냥 슬퍼할 필요는 없겠지.


그동안 고마웠어요. 우리 또 만나요.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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