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니싱(VANISHING) :: 완벽했던 그날의 공연(김종구,에녹,이용규)
완벽한 공연은 기립을 부르고, 그날의 시간을 레전드로 기억하게 만든다. 내가 오래도록 간직하게 될 뮤지컬 <배니싱> 재연 최고의 공연은, 마지막 관람을 했던 날에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지난 주 수요일 마티네 공연을 보고 난 뒤 이틀 후, 다시 찾아간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만나게 된 이야기는 배우들이 확인하게 해준 기대 이상의 열연으로 인해 인간과 뱀파이어가 존재하는 쫀쫀한 서사의 스릴러로 거듭나고도 남았다.
앞선 공연에서 발생했던 뜻밖의 참사가 안타까웠던 만큼, 오늘은 괜찮기를 바라며 마음을 졸였는데 괜한 걱정일 뿐이었다. 아주 작정한 듯이 쏟아내는 세 배우의 찰진 호흡과 개개인의 카리스마가 완벽하게 어우러짐으로써 만족감을 경험하게 했으니 말이다.
자막을 기념해 올려보는 공연 전후의 무대 사진은 보너스! 예전엔 별 생각 없이 봤었는데, 책상과 침대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실험실과 폐가로의 반복적인 장소 이동이 가능하도록 구성된 점이 유독 눈에 들어와서 인상적이었다. 2층의 활용은 물론이고, 무대 앞쪽에 설치한 그루터기로 인한 공간의 달라짐 또한 마찬가지였다.
[케이 : 김종구 / 의신 : 에녹 / 명렬 : 이용규]
초재연 배우들이 함께 만들어나간 이날의 시간에 마주한 뮤지컬 <배니싱>은 연기적인 디테일은 물론이고 넘버를 소화하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시원한 고음을 통한 가창력의 발산, 여기에 예상치 못한 소품 참사까지 차곡차곡 더해져 웃거나 울지 않고는 볼 수 없는 대서사시가 펼쳐졌다.
커튼콜에선 관객들의 기립 박수까지 더해져 환상적이었다.
용규 명렬은 의신을 친형처럼 따르며 애착이 매우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시선을 집중시켰다. 의신과 함께 시체를 해부하고자 찾아갔던 폐가에서 케이를 만난 이후에 이 사실을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며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는 모습과 명순이를 향해 투정 부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용명렬 같은 경우에는 단순히 의신을 믿기만 한 것이 아니라 피를 나눈 형제와 다름없다고 여겼기에 더더욱, 케이에 대한 연구를 자신조차 알지 못하게 숨긴 채로 비밀리에 진행하던 것이 크나큰 배신이자 타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변화가 괜히 더 짠하고 안타까웠다.
그와중에 들려온 '나에게 주어진 운명' 속 3단 고음은 충격 그 자체였다. 공연 중이라 차마 소리를 지르진 못하고 마음 속으로나마 환호와 박수를 보내게 했던 용명렬이었다. 연기도 좋지만 쭉쭉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고음과 더불어 폭발적인 성량을 발휘해 노래할 때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이와 함께, 명순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명렬이를 직접 만날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커튼콜에서도 특별히 명순이와의 투샷을 담아보았다. 훗!
지난 날의 실수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어버린 종구 케이의 활약도 대단했다. '햇빛 속으로'에서의 고음도 고음이었지만, 이 넘버 부를 때마다 흘러내리던 눈물이 그의 서글픈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안쓰럽지 않을 수 없었다. 퇴장을 위해 움직이면서 장갑으로 슬쩍 눈가를 훔치던 장면도 언제나 마음 깊이 여운을 남겼다.
뮤지컬 <배니싱>에서 가장 강렬한 넘버는 핏빛 조명 아래서 펼쳐지는 '나를 마셔'인 게 맞지만, 작품 전체의 의미를 아우르며 메시지를 전하는 곡은 '햇빛 속으로'라는 점에서 이 순간마다 케이의 목소리와 더불어 가사까지 곱씹게 된다. 이날은 가사 실수 없이 모든 곡이 완벽해서 최고였다! 폐가에서의 첫 만남 때 "나가!"를 대사가 아니라 노래로 감정을 실어 외치던 것도 취향이었다. 종구 케이의 청량한 넘버 소화력을 좋아한다.
축배를 한입 머금긴 했으나 차마 삼키지 못하고 스프링쿨러처럼 바닥에 전부 뿜어서 물기가 가득했는데, 의신이 그걸 보고 섭섭해 하는 것이 웃음을 자아냈다. 피와 땀으로 만든 거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매번 코트자락을 휘리릭 젖힌 채로 자리에 앉는 것도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외로웠던 케이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민 의신을 빛으로 칭하며 함께 하기만을 꿈꿨던 그이기에 마지막까지 미워할 수도 없었다. 의신과 열창한 '비과학적 사실들'도 귀를 집중시키기 충분한 곡이었다. 이와 더불어 삼중창에서 눈물 흘리며 허탈한 미소 짓던 찰나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여름 밤은 참 짧기도 하지."라는 문장을 읊조릴 때의 케이도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서야 밝히는 소품 참사의 진실은 위의 사진에 답이 있다. 종구 케이 뒤로 보이는 책상의 오른쪽 아랫부분이 부서져 버린 것이 눈에 아주 잘 포착된다. 의신이가 케이를 피하려고 뒷걸음질치다가 밟아서 고장냈다. 얼마나 놀랐으면......;ㅁ;
아마도 다음날엔 수리가 잘 돼서 무대에 올랐겠지만 이날의 부상은 잊지 못할 에피소드로 증거사진까지 남았으니 오래도록 잊지 못할 거다. 발목 위로 살짝 올라오는 케이의 바짓단도+_+
에녹 의신은 언제나 안정감 있는 노래 실력을 맞닥뜨리게 해줘서 그게 참 마음에 들었다. 'K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며 순수한 탐구 열정을 드러내고 '위대한 발견'을 통해 연구에 진전을 보이며 케이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순간이 좋았다. 둘의 행복했던 한때는 잠깐이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그중에서도 '목이 말라'에서 지킬앤하이드 못지 않은 이중성을 드러내며 갈등을 표출하는 장면이 특히나 압도적이었다. 이와 함께 유일하게 그루터기를 활용할 줄 아는 인물이라 의미가 남달랐다. 그루터기로의 유연한 점프를 통하여 피에 대한 갈증과 고뇌를 전하는 장면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
'햇빛 속으로 rep'이 절정에 달하고, 그로 인해 무대로부터 객석을 향해 쏟아지던 햇빛과도 같은 찬란한 조명의 움직임 역시 공연의 취지와 잘 맞아서 빛의 일렁거림으로 인해 한순간 따뜻함을 건네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 만큼은 눈이 많이 부시니 감안해야 할 것이다. 2층이라면 오츠카로 보는 것을 강력 추천한다.
덧붙여 무대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한 장의 종이는 용명렬이, 어느 순간 떨어져버린 의학서적 한 권은 종구 케이가 손에 쥔 채로 퇴장함으로써 처리해 깔끔하게 주변 곳곳을 관리하는 장면도 흥미로웠다. 덧붙여, 이날 멋진 공연을 보여준 세 배우에게는 아낌없는 기립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커튼콜이 펼쳐지자마자 관객들은 기립으로부터 세 배우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완벽했던 그날의 공연은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레전드와 함께 참사까지 만나볼 수 있어 유익했던 시간.
항상은 아니지만 때때로 레전과 참사의 공연 속엔 내가 있었다. 초연에 비해 아주 조금은 더 탄탄해진 이야기 덕택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봤고, 기립의 추억까지 쌓게 돼서 매우 신난다. 앞으로도 계속 레전의 길을 걷고 싶다.
기분 좋게 자막을 완료한 뮤지컬 <배니싱> 재연 마지막 사진은 직원들이 손수 그리고 오려 붙인 수제 캐스팅 보드와 함께 한다. 스펀지밥 버전으로 그림 솜씨가 탁월할 뿐만 아니라 센스까지 넘치는 것이 재밌고 유쾌했다.
스펀지밥을 포함해 여러 버전이 존재한다는 점이 킬링 포인트! 요 공연을 보러 가는 관객들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이 캐스팅보드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1층 객석 로비의 재관람 카드 도장 및 엠디 판매 부스 사이에 위치하니 참고하시라!
이제 나는 사라지겠습니다. 뮤지컬 <배니싱>에서 배니싱(Vanishing)......바이바이.
'문화인의 하루 > 공연의 모든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 쉽지 않은, 그러나 알고 싶은 두 사람의 이야기 (0) | 2018.11.01 |
---|---|
[뮤지컬] 팬레터 :: 삶을 구원하는 문학, 영원한 뮤즈를 향한 고백 (0) | 2018.10.27 |
[뮤지컬] 배니싱 :: 경성을 뒤흔든 뱀파이어의 출현 (0) | 2018.10.22 |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 기억할게, 나를 있게 한 모든 순간을. (0) | 2018.10.22 |
[뮤지컬] 트레이스 유(Trace U) :: 락 스피릿 가득한 클럽 드바이, 개장! (0) | 2018.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