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더 픽션 :: 소설과 현실을 넘나드는 놀라운 이야기의 세계

소설은 책을 읽는 순간 만큼은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며 독자들을 위한 비상구가 되어준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대변하는 작품들도 적지 않지만, 실제로 발생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을 마주하도록 하며 일탈의 찰나를 만끽하도록 도울 때도 많기에 다양한 관점에서 픽션의 재미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소설을 현실로 눈 앞에서 직면하게 된다면 어떨까? 단순히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허무는 엄청난 사건으로 기록되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뮤지컬 <더 픽션>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흥미로운 공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신문사 기자 와이트 히스만은 소설가 그레이 헌트를 찾아가 신문에 실을 연재소설을 부탁한다. 오랜만의 의뢰에 들뜬 그레이는 아직 발표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건네보려 애쓰지만, 와이트는 이전에 발표했던 '그림자 없는 남자'를 재구성해 내보내려 그를 설득한다. 단호하면서도, 다정하게.


두 사람이 함께 써내려간 소설의 주인공은 살인마 블랙으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범죄자를 심판하는 인물이었다. 신문을 통해 '그림자 없는 남자'가 이어지던 어느 날, 소설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을 이기지 못한 그레이는 신문사의 연재 중단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나 와이트는 포기하지 않는다. 바로 이때 살인마 블랙이 실제로 등장함에 따라 작품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폭발하기에 이르는데 그 절정의 순간, 소설의 결말과 같이 그레이 헌트가 죽음을 맞이하고 이를 의문스럽게 여긴 형사 휴 대커가 와이트를 찾아오면서 사건의 진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한다.




휴 대커 : 임준혁


휴는 와이트가 블랙의 정체와 더불어 그레이의 죽음에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확신, 그와의 만남을 통하여 관객들이 사건에 빠져들수 있도록 돕는다. 계속되는 조사로 인해 밝혀진 증거를 토대로 놀라운 반전을 전해주기도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정보 전달자로의 역할만으로 캐릭터가 지닌 매력을 감지하기에는 아쉬운 비중이었다. 


뿐만 아니라 와이트와 휴 사이에 더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85분으로 정해진 공연 시간을 이유로 많은 부분의 생략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여겨져 안타까웠다. 이와 함께, 살인사건 용의자와 형사의 대화라고 보기에는 긴장감이 덜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휴 대커가 아니라 블랙일 때의 매력이 폭발했다. 살인마가 누군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킴과 동시에 1인 2역을 맡은 배우에게 이목을 집중시키게 해주는 블랙은 그야말로 안성맞춤 캐릭터였다. 


임준혁 배우의 블랙은 등장인물을 탄생시킨 그레이를 옥죄며 존재감을 발산했다. 작가를 향해 음산한 기운을 뻗으며 한 걸음씩 다가서는 움직임의 유연함이 흥미로웠다. 결론적으로는 형사와 살인자라는 오묘한 경계를 다채롭게 연기하는 모습에 시선이 절로 갔고, 시원한 노래 실력에 귀 또한 기울이게 했던 시간이었다. 덕분에, 차기작이 기대되는 배우로 남았다. 임휴 굿! 




와이트 히스만 : 박정원 


박정원 배우의 와이트는 마치, 한 명의 덕후와도 같았다. 좋아하는 소설을 쓴 작가와의 만남에 두근거림을 감추지 못하고, 그가 집필한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라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서 그레이와 그레이의 소설 덕후임을 스스로 인증하고 있었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담당 기자가 되어 가장 먼저 소설을 읽게 되는 영광이 주어짐에 감사하고 또 감격함으로써 말을 쉽게 잇지 못하며 주저하던 순간은 일명 성덕, 성공한 덕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하여 성덕이 된 와이트가 마냥 부러웠는데, 한편으론 진심으로 기뻐하는 걸 보고 있자니 나까지 즐겁고 설레더라. 덕후의 마음은 덕후가 잘 알지요



순수했던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며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예기치 않은 길로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와이트. 그의 '그림자 없는 남자'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과거에 겪어야 했던 상처로 연결되며 극적인 설정을 더했다. 더불어 기쁠 땐 환하게 웃고, 슬플 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절절한 감정표현을 쏟아내서 와이트에 대한 연민 또한 경험하게 만들었다. 





그레이 헌트 : 박유덕 



박정원 배우의 와이트 히스만은 그레이와 그레이의 소설 밖에 모르는 바보였고, 박유덕 배우의 그레이 헌트는 글쓰는 것 밖에 모르는 바보였다. 와이트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데 반해 그레이는 뒷일을 생각하며 결정을 내릴 줄 알아 현명함이 도드라지는 점에서도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소설의 인기로 명성을 얻기보다는 곁에 존재하는 이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않도록 따스한 인정으로 감싸며 힘을 실어주려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글은 사람에 의해 창작되는 것이므로. 주객이 전도되지 않게, 앞으로 쓰여질 한 사람의 인생을 위한 선택이 눈물겨웠다. 자신을 알아봐 준 유일한 사람을 위한 일이었음을 알면서도.


공연 도중에 의자의 위치를 잘못 인지해 앉다가 휘청거리는 장면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당시의 심각한 상황에 대한 그레이의 심리와 맞아 떨어져 절묘하게 느껴졌고, 배우가 다치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정원 와이트와 유덕 그레이의 화음도 만족스러웠고, 둘이 맞춰 입은 듯한 멜빵 스타일 의상도 예뻤다. 



뮤지컬 <더 픽션>은 현실이 되어버린 소설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한 줄의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그레이의 문장을 마음 속에 새기며 살아왔던 와이트가 보여주는 삶은, 오로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공연 전반에 걸쳐 보여지는 이야기는 휴먼 심리 스릴러에 입각해 유유히 흘러갔다. 다만, 스토리의 개연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연결고리의 허술함은 보완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와이트가 맞닥뜨렸던 어린 시절의 상처와 그레이가 '그림자 없는 남자'를 집필하는 계기가 되어준 잊지 못할 기억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었어도 나쁘지 않을 법 했다. 형사와 와이트 사이에 감춰진 시간과 그레이가 블랙을 만들어낸 동기에 대해서도 조금 더 보여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전체적으로 극이 불친절해서 이로 인한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무대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른 시간의 변화와 원고로 가득한 공간의 묘미, 배우들의 열연과 강렬한 넘버가 선사하는 음악의 매력은 그 와중에도 빛났다. 조금만 다듬으면 훨씬 더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여, 이 공연의 중심 인물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색상의 이름을 지녔기에 여기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순수함 그 자체였던 순백의 소년(White)이 성장해 나가면서 자신이 지키려는 세상과 맞서기 위해 칠흑같은 어둠(Black)과 손을 맞잡고 잔혹함을 드러내려던 찰나, 살아오는 동안 선과 악을 모두 경험함으로써 그것이 적절히 어우러졌을 때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음을 아는 이(Grey)가 구원자로 등장하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부여한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자신이 믿고 있는 가치가 전부는 아님을 깨닫게 해준 그레이와의 만남은 와이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소설과 현실을 넘나드는 이야기의 세계가 놀라움을 전했던 뮤지컬 <더 픽션>. 다른 공연에 비해 러닝 타임이 길지 않아 부담없이 관람할 수 있는 점이 좋았는데, 다음에 올 땐 이왕이면 극의 밀도감도 높여서 제대로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커튼콜의 말미에 들려오던 와이트의 독백과 책을 손에 꼭 쥔 채 미소 짓던 모습 또한 감명깊었다. 한 줄기 빛과 같았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갖게 된 그를 보며 언젠가 나에게도 그러한 날이 찾아오기를 소망해 본다. 다른 사람에게 특별하게 남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간직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현실의 삶이란 때때로 한 편의 소설보다 소설 같으며, 한 사람은 하나의 이야기로 남는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한 편의 이야기로 남길 원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간직하고픈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더 픽션,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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