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특유의 온기 가득한 SF 단편 소설의 매력

김초엽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는 작가 특유의 온기로 가득한 SF 단편을 중심으로 채워져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총 7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야기를 통하여 짙은 서정성이 녹아든 SF장르의 개성을 만나보는 일이 가능해서 깊이 몰입한 채로 한 권의 책에 푹 빠져들었다. 

 

 

'최후의 라이오니'는 복제 과정에 결함이 생겨 탄생된 복제인간 라이오니와 기계들의 우정을 바탕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뜻깊었다. 한때 뛰어난 생명 공학 기술을 보유한 불멸의 도시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멸망을 눈 앞에 둔 상황 속에서 오래 전에 이곳을 떠난 라이오니를 여전히 기다리는 기계들의 리더 셀의 얘기가 조사를 위해 발을 디뎠다가 라이오니로 오해받아 사로잡힌 로몬의 시점을 통하여 일깨워주는 진실이 안타까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온전한 불멸인이 되지 못한 복제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피어난 서로를 향한 믿음이 인상적이었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각인되지 않은 존재임에도 두려움을 지닌 로몬이 정체성을 의심하다 마침내 결론에 다다르던 순간도 감명깊었다. 

 

'마리의 춤'은 모그인 마리가 다른 모그들과 함께 무대에서 공연을 펼치고자 무용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시지각 이상증을 가진 모그들은 무용의 섬세한 움직임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정윤에게서 사촌동생을 소개받아 가르치게 된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지만, 마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춤을 완성해 나간다. 환경오염의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시신경에 이상이 생긴 모그들은 시각적 정보를 구별하는 일이 쉽지 않은 반면, 플루이드를 통하여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발상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와 함께 일반인 전부를 모그로 만들어 모두가 평등해지길 바랐던 마리의 소망이 차별에 대항하기 위한 결정이었음을 깨닫게 돼 마음이 아팠다. 

 

'로라'는 진이 말하는 여자친구 로라의 얘기를 담아낸 단편이다. 트랜스휴먼으로 몸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하는 고유수용 감각의 어긋남으로 인해 잘못된 지도를 가져 세 번째 로봇 팔을 장착한 채 살게 된 인간의 삶과 사랑이 감명깊게 다가왔다. '숨그림자'는 지하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 불시착한 우주선에서 동면 상태에 있던 조안을 해동하는데 성공하며 벌어지는 스토리를 다뤘다. 입으로 소리를 내서 말하는 원형 인류 조안과 호흡을 통하여 말의 의미를 전달하는 숨그림자 인간 단희의 대화방법이 흥미로움을 자아냈고, '오래된 협약'은 벨라타 행성에 사는 사제 노아가 이곳을 방문했던 지구인 이정에게 행성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짧은 수명을 지닌 채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편지글로 만나보게 해줘서 관심을 집중시켰다. 

 

'인지공간'은 인류의 공동 지식이 한데 모여있는 인지공간을 무대로 펼쳐진다. 어른이 되면 인지공간에서 지식을 습득하는 일이 가능해지는데, 이브는 신체적으로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진입할 자격을 얻지 못한다. 제나는 이브의 유일한 친구와 다름 없었으나 인지공간에 들어가게 되면서 둘 사이는 첨예한 의견 대립으로 인해 점점 멀어진다. 그러다 마침내 제나가 인지공간 이외의 세계에 대해 말하던 이브의 말을 뒤늦게 이해하며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던 순간이 탄성을 내뱉게 도왔다. 

 

 

마지막 단편으로 접하게 된 '케빈 방정식'은 촉망받는 물리학자로 해외에서 국지적 시간 거품을 연구하던 언니 현화가 사고로 인해 식물인간과 다름 없는 상태로 한국으로 돌아온 뒤, 동생 현지와 오래간만에 조우하며 괴소문이 무성한 울산 백화점 옥상의 관람차에 탑승해 맞닥뜨리는 찰나가 놀라움을 선사했다. 특히, 우리 우주는 수많은 주머니 우주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관람차에서 확인하게 된 뜻밖의 경험이 자매 사이의 묵은 갈등을 해소시킴과 동시에 끈끈한 우애를 다지는 분위기로의 변화를 이끌어서 그에 따른 묘미가 돋보였다. 

 

역시나 김초엽은 김초엽이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이어 만나게 된 새로운 단편 소설집 역시도 만족스러움을 전해주었다는 점에서 읽기를 잘했다 싶었다.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머리 속으로 떠올리도록 도우며 미소 짓게 만드는 다정함이 담긴 7편의 이야기가 감탄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결핍에 대한 저항과 수긍, 그 어떤 선택에 상관없이 방향을 정한 이들의 모든 순간에 위로를 전하는 메시지도 최고였다.  

 

책 속에 다소 낯설고 어려운 용어들이 포진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SF소설로의 접근을 쉽게 돕는 작가임을 깨닫게 해준 김초엽의 위력이 여전히 도드라져서 재밌게 잘 읽었다. 풍부한 상상력을 토대로 작가가 맞닥뜨리게 해준 SF 단편소설의 매력이 너무나도 눈부셔서 나 역시도 지구 너머의 세상을, 우주를 포함하여 무한한 세계를 향한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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