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어둠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 빛의 서사를 만나다

최은영의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은 4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는 삶의 시간을 잔잔하고도 담담하게 풀어낸 작가의 문장들이 마음을 두드리는 작품이었다. 남편과 이혼 후,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희령으로 내려와 일하게 된 지연은 열살 때의 만남 이후로 20년이 훌쩍 넘어 이루어진 할머니와의 예상치 못한 재회를 통하여 놀라운 사실을 전해 듣는다. 할머니의 엄마인 증조 할머니의 인생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말이다.

 

그리하여 백정의 딸로 태어난 증조 할머니 삼천이 양민의 자식인 증조 할아버지 희수와 함께 하게 된 사연, 할머니 영옥이 증조 할아버지로 인해 아내가 있었던 길남선과 결혼한 뒤 엄마 미선을 혼자 키워야 했던 일, 미선이 아버지 문제로 말미암아 시댁 식구들로부터 괄시당하며 결혼 후에도 평탄치 못한 시절을 보냈던 얘기가 지연의 현실과 교차되며 안타까움을 극대화시켜 마음이 아려오는 순간이 많았다. 

 

 

증조 할머니 삼천, 할머니 영옥, 엄마 미선, 딸 지연이 경험해야만 했던 비극적인 상황들이 시대를 뛰어넘는 연결고리로 남아 슬픔을 선사할 때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성들의 연대가 단단하고도 뿌리깊게 자리잡으며 그들을 지탱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삼천이에게 새비라는 친구가 생기면서 잔혹한 현실을 견뎌나갈 수 있었던 시절을 중심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거슬러 올라가며 만나는 일이 가능했던 서사의 무게감이 책 속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삼천과 새비의 딸인 영옥과 희자가 엄마들 못지 않게 돈독한 우애를 선보인 때도 마찬가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포함하여 참담한 역사를 겪어낸 여성들의 고통과 깊은 상처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테지만, <밝은 밤>에 담긴 이들의 목소리가 전하는 울림 만큼은 오래도록 기억하려고 한다. 마냥 허구라고만 생각되지 않는 내용들이 눈에 밟혔다. 

 

이와 함께 희령이라는 공간이 지닌 의미가 네 사람을 거쳐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뜻깊은 메시지를 전달해줘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뿐만 아니라 지연이 희령에서 할머니와 속깊은 대화를 나눈 날들을 기점으로 절망이 아닌 희망을 향해 나아가던 모습도 잊지 못할 것이다. 

 

단편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통해 알게 된 최은영 특유의 결이 역시나 이 책에서도 뚜렷한 개성으로 드러나 인상적이었다. 인물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몰입하게 만드는 작가의 강점이 돋보였다. 

 

 

덧붙여, 책 제목으로 선정된 <밝은 밤>의 의미와 가치가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들어서 흡족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무섭고 깜깜한 밤의 이미지가 아닌, 어둠 사이로 살며시 스며든 빛이 환하게 길을 밝혀주는 찰나를 연상시키게 돕는 단어의 묘미가 제대로 전해져 와 감명깊었다. 한 마디로, 고단한 삶을 버텨 온 사람들을 위한 찬사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 빛의 서사가 슬픔을 위로하며 따뜻하게 곁을 감싸주는 분위기가 눈부셨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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