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여행 에세이

정세랑의 첫번째 에세이로 발매된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는 작가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한 권의 여행책이라는 점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쓰여진 다채로운 삶의 기록을 만나볼 수 있어 읽는 내내 인상적이었다. 그리하여 뉴욕, 아헨, 오사카, 타이베이, 런던에서 보낸 시간을 글로 마주하는 동안 여행의 대리만족을 경험하게 해주는 흥미로운 한때를 이어나가는 일이 가능했다. 

 

 

다만, 여행하는 즐거움을 중심으로 쓰여졌다기보단 떠남으로 인해 발을 디딘 곳에서 맞닥뜨리게 된 사람, 문화예술, 환경의 사유가 주를 이루는 여행 에세이였으므로 이 점을 기억하고 책을 읽어 내려간다면 더 좋겠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정세랑이 집필하는 소설의 원천을 확인하게 돼 기뻤다.

 

자신을 처음 여행하게 만든 대학 때 친구 L로 인해 2012년에 미국 뉴욕으로 향하며 시작된 이야기의 서막은 독특하게도 작가가 여행을 즐기지 않게 된 이유로 옮겨가며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어린 시절에 소아 뇌전증을 앓은 것이 가장 컸지만, 다른 사람의 여행을 좋아하는 성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깨닫게 돼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재밌게 쓰여진 여행 책, 선명한 화질로 담아낸 여행 프로그램을 포함해 친구들이 직접 다녀와서 보여주는 사진과 들려주는 얘기만으로 흡족함을 느끼는 마음이 충분이 이해가 됐다. 덕분에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않는 경우에는 스스로 여행을 잘 떠나지 않는 편이라는 말의 의미도 깊이 와닿았다.  

 

이와 함께 9년째 써오던 여행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가 코로나로 인해 외출이 쉽지 않은 지금에서야 발매된 건 꽤나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었나 싶다. 안 그래도 정세랑의 새로운 책을 기다렸던 독자의 입장에서 최적의 순간을 맞이하게 돼 무척 즐거웠다. 그로 인해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좋아하는 작가의 여행기로 대신할 수 있어 다행스럽기 그지 없었다.  

 

덧붙여 오사카를 제외하면 내가 가 본 적 없는 여행지에서의 찰나가 녹아든 책은 차분하게 곱씹으며 잔잔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책이라 더 안심이 됐다. 소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세랑 본체의 가치관이 에세이에 절절하게 스며들어 페이지를 넘기며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여기에 더해 편집자 겸 작가로, 편집자의 커리어가 더 높이 쌓여가는 도중이었음에도 작가가 되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은 동기도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진 사랑의 결실에 여행이 자리잡았다는 점도 새롭게 알 수 있어 놀라움을 자아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여행지 중에서는 아헨이 가장 궁금해졌다. 그리고 아헨의 생강 쿠키도. 여행하는 곳에서 만나게 되는 특산물 구입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더 구미가 당겼고, 선물하고 싶은 얼굴도 머리 속에 곧바로 떠올라서 괜시리 심장이 두근거렸다. 참고로 아헨은 독일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온천도시이자 역사의 도시로, 벨기에 및 네덜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장소라고 한다. 

 

그리고, 영화 예매 이벤트 1등 당첨으로 다녀 온 런던 여행의 묘미 역시도 기가 막혔다. 셜록홈즈의 베이커 스트리트를 거닐고, 뮤지컬 관람을 하는 게 나의 여행 로망 중 하나라서 부러움이 밀려왔던 순간이 있었다.  

 

여행 속에서 정세랑이 만난 사람들이 건네는 온기, 미술관과 박물관을 섭렵하며 문화예술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던 문장, 환경주의자로의 행동력과 마음가짐이 돋보이던 책이 바로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였다. 반면에 여행이 빚어낸 어두운 이면과 관광상품의 폐해까지 짚어나가며 성찰을 도왔던 점도 기억에 남았다. 

 

에세이에서 또한 소설 못지 않게 발랄하면서도 사려깊은 문체에도 푹 빠졌다. 장르소설에 대한 자부심도 멋졌고,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기원을 살짝 엿본 기분이 들어 만족스러웠다. 

 

여행 그 자체의 기록이 아니라 여행을 하며 그 안쪽에 축적된 것들에 중점을 둔 책이라는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하게 된 에세이였다. 소설보다 책 뒤에 남겨진 작가의 말이 더 재밌다는 얘기를 듣는다는 주인공답게 이 책에 남긴 정세랑의 후일담도 눈여겨 볼만 했다.

 

 

찾아낸 보물들을 충분히 품고 있어 비행기를 덜 타는 사람으로, 앞으로도 별로 여행하지 않을 거라는 작가의 말에 담긴 굳은 결의가 눈부시게 빛났다. 푸르른 숲과 활기찬 새들의 날개짓 역시도 정세랑을 설명하는 표지 디자인으로 완벽했던 한 권의 책이었음을 밝힌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정세락 작가의 새로운 책에 대한 기대감과 코로나가 종식되고 난 후의 여행을 상상하며, 이제는 색다른 여행 에세이와의 시간을 마음 속에 간직해 두려고 한다. 

 

"나의 노래 부르며 행진하는 스머프 같은 성격이 (특히 동료 작가들에게) 좀 부담스럽다는 평을 들을 때도 있는데, 나름의 맥락이 있다. 어둡고 죽어 있는 우주에서 기적 같은 지구에 산다는 것이 신기해, 냉소와 절망에 빠졌다가도 빨리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17p)

 

"어쨌건 좋아하는 것을 열렬히 좋아하는 편이고, 새로 좋아할 만한 것을 만날 준비가 항상 되어 있기도 해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뭔가 힘든 일을 만나 마음이 꺾였을 때 좋아할 만한 대상을 찾으려고 하면 이미 늦은 감이 있다. 괜찮은 날들에 잔뜩 만들어 두고 나쁜 날들에 꺼내 쓰는 쪽이 낫지 않나 한다." (41p)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