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심판 속 인간 아나톨,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유의지를 외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으로 접할 수 있었던 <심판>은 작가 특유의 재기발랄함이 돋보이는 희곡집이었다. 폐암수술 도중 사망한 아나톨이 천국에서 피고인이 되어 변호사 카롤린, 검사 베르트랑, 재판장 가브리엘을 만나며 지난 생을 돌아봄에 따라 다음 생을 결정하게 되는 재판 절차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져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총 3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나톨 피숑이 자신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천국에 도착해 변호사, 검사, 판사를 마주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1막, 피고인이 살아온 생애를 조목조목 살피며 갑론을박 논쟁을 이어가던 2막, 최종판결 후에 정해진 다음의 삶을 위해 치뤄지는 일련의 과정으로 구성된 3막까지, 전부 다 깊은 몰입도를 자랑해서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아나톨의 인생을 짚어보는 흐름 안에서 카롤린, 베르트랑, 가브리엘의 과거와 남다른 인연까지 맞닥뜨리게 돼 흥미로웠다. 살아 생전에 판사로 심판하는 일을 도맡았던 아나톨이 천국에선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게 됐다는 설정도 의미심장함을 남겼다.


인간이었을 때 좋은 사람으로 살았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아나톨의 얘기에 피고인의 수호천사이자 변호를 맡은 카롤린은 동조하지만, 검사 베르트랑의 반격을 통해 드러나는 죄가 없지 않았으므로 이때부터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이와 함께, 아나톨 피숑 이전의 다양한 삶까지 한꺼번에 재조명하는 동안 지금의 당신이 당신의 다음 생을 결정한다는 문장이 인상깊게 남았다. 천국에 남아 있거나 다시 태어나야 하거나. 심판으로 인한  결론은 둘 중 하나 뿐이었으나 사형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처해지는 삶의 형에 따른 각종 옵션도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음은 물론이다. 


그 와중에 삶이 두렵다는 아나톨의 말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게다가 판사라는 직업을 갖고 살아 온 세월이 짧지 않았으므로, 천국의 심판을 받으면서 조금씩 성장해 나가던 주인공의 모습이 눈여겨 볼만 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은 유전 25%, 카르마 25%, 자유의지 50%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아나톨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유의지를 외치며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으로 키를 쥐고 나아갔다는 점에서 감동을 자아냈음을 밝힌다. 덕분에 모두를 위한 엔딩이 되지 않았나 싶다. 


한 명의 인간과 천국의 존재 셋이 환생을 두고 대립하는 장면들이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다소 느슨한 분위기와 유연함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점도, 베르나르 베르베르 특유의 익살스러운 문체를 경험하게 해줘서 재밌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유머를 섞어 현실을 비판하며 웃음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수긍 가능한 결말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은 것 역시도 베르나르 베르베르다웠다. 그리하여 책을 읽어내려갈 때마다 무대 위에 선 등장인물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서 매력적이었다.



인물들의 대사 위주로 지문과 해설이 곁들여지는 희곡의 특징이 맛깔나는 독서를 선사했던 한때였다. 예전에는 공연장에서 공연을 직접 보는 걸 더 좋아했는데, 요즘은 희곡집을 읽으며 무대 위에 선 캐릭터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공연 관람에 앞서 대본을 먼저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기회가 된다면 연극 <심판>을 무대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소망해 본다. 책 속에 구현된 천국의 법정, 그곳이 현실이 되어 생생한 현장감을 토대로 눈 앞에 나타나 객석에 자리잡은 관객들을 사로잡게 될 날을 꿈꾼다. 만약 그때가 온다면, 내 자리 하나 쯤은 있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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