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드릴게요, 읽을수록 재밌는 정세랑 SF 소설집

정세랑의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데뷔 10주년을 맞이하며 출시된 첫 SF 소설집으로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써내려간, 그리하여 작가가 단편에 녹여낸 이야기의 역사 속에서 재치와 더불어 따뜻한 시선을 경험하는 게 가능한 책이었다. 

SF 장르에 대한 낯설음이 아직 존재하는 관계로 처음 이 소설집을 접했을 땐 텍스트가 생각보다 잘 안 읽혀서 내용 자체가 마냥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책으로 손이 가는 걸 멈추지 못했고, 이로 인해 지금은 읽을수록 재밌는 책이 되었다.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 '11분의 1', '리셋', '모조 지구 혁명기', '리틀 베이비블루 필', '목소리를 드릴게요', '7교시',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이렇게 총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정세랑의 SF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에는 작가의 세계관이 뚜렷하게 반영된 캐릭터와 스토리가 존재함에 따라 여성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지구의 파괴를 일삼는 인류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가 도드라져 인상적이었다.

인간들이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켜 나가며 쓰레기만 무책임하게 만들어내는 일이 반복되자 우주선을 타고 온 거대한 지렁이들이 인간들로 하여금 탄생된 인공물을 전부 삼켜버림에 따라 맞닥뜨리게 되는 '리셋'에선 자연과 환경을 향한 작가만의 가치관이 돋보였다.

대학 시절 동아리의 유일한 여성 멤버로 나머지 11명의 남자 선배들 중 1명을 좋아했던 유경이 첫사랑을 살리기 위한 프로젝트에 마지막 일원으로 합류한다. 그로 인하여 휴가를 연장한 이후에도 사직서를 낼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를 직장 동료였던 혜정에게 써보낸 편지글 형식의 단편인 '11분의 1'도 좋았다. 

여전히 엉뚱하고 철없는 오빠들이지만 기준을 위한 기술 개발과 치료가 목적이므로 유경 역시 힘을 보태지 않을 수 없었고, 함께 일했던 혜정을 좋아했기에 거짓말 대신 온기 가득한 얘기 안에서 안부와 작별을 동시에 전하는 에피소드가 마음을 움직였다. 오빠들에게 쏟아내는 시원한 분노의 말들과 오직 혜정만을 위한 다정함이 대비를 이룰 때 확인이 가능했던 문장력에 특히나 감탄하게 만든 소설이었음은 물론이다. 이와 함께, '11분의 1'은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으로부터 이어지는 오프닝에 걸맞는 작품이기도 했다. 

소설집의 표제작이 된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인물들이 머무는 수용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제자들이 살인자가 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영어교사 여승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뿐, 성대 제거 수술을 받거나 평생 수용소에서 머무르거나. 각기 다른 특별한 능력을 보유함으로써 같은 공간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수용소 밖의 세상을 궁금해하지 않은 채로 평온한 일상을 보내다가 어느 날 등장한 연선을 통해 변화를 꾀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맞닥뜨리는 결말이 감명깊었다. 등장인물들 각자가 지닌 초능력의 기발함도 마찬가지였다.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는 정세랑의 SF 소설집 마지막 이야기로 안성맞춤인 단편이었다. 양궁 메달리스트 정윤이 인간의 좀비화에 절망하며 활시위를 당기는 순간 속에 담긴 사랑과 생존을 위한 갈망은 결말에 다다라 희망의 목소리를 남겨둔 채로 페이지를 덮게 만들어 안심이 됐다. 

8개의 단편이 나열된 순서마저 마음에 쏙 들었던 정세랑 SF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였다.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개성 넘치는 글을 통해 독자들을 사로잡는 정세랑 작가의 매력을 이번 작품에서도 만나볼 수 있어 행복했다. 

장편이 아닌 단편 소설집이라서 참신한 소재를 기반으로 쓰여진 SF 장르의 세계를 여럿 만끽하게 돼 즐거웠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다음에 이 책을 다시 집어들게 될 땐 미처 언급하지 않은 다른 단편들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리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읽을 때마다 베스트 단편이 바뀔 가능성도 다분하다. 

덧붙여, 책표지에 그려진 캐릭터가 단편 속 인물들을 곧바로 떠올리게 만드는 점도 유쾌함을 자아냈다. 범상치 않은 세계를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삶을 계속 응원하며, 앞으로는 주어진 현실에서 나 역시도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 마음먹게 해주는 소설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상당했음을 밝힌다. 덕분에, 차기작도 매우 기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