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니진스키 :: 발레뤼스와 디아길레프를 통해 깨어난 춤의 시작과 끝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초연 중인 뮤지컬 <니진스키>는 프리뷰 티켓 오픈 당일에 예매했다가 캐스팅이 변경되는 바람에 환불받고, 인터파크 티켓 홈페이지에서 퍼플라벨 타임세일 이벤트로 40% 할인을 하길래 다시 잡아 관람하게 된 공연이었다. 보기 전부터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그래도 직접 작품을 만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뮤지컬 <니진스키>는 러시아로 귀화한 폴란드계 무용수이자 비운의 천재 발레리노로 알려진 실존 인물,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담아낸 것이 특징이었다. 그의 춤에 대한 타고난 재능은 그것을 일찌감치 알아챈 디아길레프로 인해 발레뤼스의 수석 무용수로 자리잡게 됨으로써 빛을 발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뛰어난 무용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안무가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음악 속에 자신만의 개성을 담은 신작 "봄의 제전"을 선보이는데, 이를 발표함에 따라 불거진 혹평과 불화가 그를 비극적 삶으로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공연 장르는 뮤지컬이나 발레리노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색다른 볼거리를 만나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컸던 작품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에 대한 만족도는 겨우 50% 정도로 완벽하게 충족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배우들이 기대 이상으로 잘해줘서 그게 참 좋았다. 그러나 배우들을 제외한다면, 떠올릴수록 아쉬움이 훨씬 더 많은 공연이 뮤지컬 <니진스키>였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 두드러졌던 건 스토리 전개의 단조로움이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뻔한 흐름이 계속 이어지는 일관성이 지루함을 불러 일으켰다. 실화를 대부분 정직하게 나열해 놓는 방식으로 니진스키의 생애를 알려주는 것이 전부라서 재미가 없었다. 분명히 그 안에서도 흥미를 유발해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한 포인트가 존재했을텐데, 이를 활용하려는 노력이 전혀 안 보였다.
이야기의 진행 방식보단 넘버가 그나마 귀에 들어왔다만, 때때로 난해한 멜로디의 향연이 느껴져 배우들이 꽤나 고생했겠구나 싶었다. 근데 공연 관람 후 생중계까지 시청하고 나니 자꾸 생각나고 맴도는게 심상치 않다. 디아길레프의 '기억'과 '네가 가진 것', 니진스키의 '어디에나'가 특히 그랬다.
앞서 얘기한 것에 이어 풀어보는 뮤지컬 <니진스키>의 아쉬웠던 점으로, 타이틀롤이 아닌 디아길레프가 더 기억에 남는다는 점도 꼽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주인공이 돋보이기 위해선 그의 재능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본다. 그런데 그게 없었다.
주역을 맡은 3명 모두가 대한민국 공연계에서 몸을 잘 쓰기로 유명한 배우인 건 맞다. 하지만 무용수가 아닌 뮤지컬 배우이기에 천재 발레리노를 표현해내는데 있어 한계를 맞닥뜨려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작품에 있어 단점으로 부각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대신에 실제로 발레와 현대무용을 전공한 배우들이 니진스키의 분신을 맡아 출중한 움직임을 마주하게 해줬는데, 이게 굉장히 흥미로우면서도 미묘한 감정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페트루슈카"와 "봄의 제전"이라도 좀 더 웅장하고 멋스럽게 보여줬더라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이 있긴 한데, 소극장 공연에서의 최선을 선보였음을 알기에 더 바라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뮤지컬이 아닌 발레를 통해 니진스키를 만나고 싶어졌던 건 나 뿐만이 아니었을 거라 짐작해 본다.
아, 그래도 무대 연출은 꽤 괜찮았다. 영상의 쓰임새와 무대에 설치된 장치의 활용이 흥미를 유발하는 순간이 없지 않았다. 책상이 피아노가 되고, 고정된 문이 빌트인 냉장고가 되어 그 안에서 와인과 와인잔이 나오는 장면이 의외로 기발했다.
[CAST]
니진스키 : 정원영
디아길레프 : 김종구
스트라빈스키 : 홍승안
로몰라 : 최미소
한스 : 박수현
한스 역의 박수현 배우는 멀티 캐릭터로 활약했는데 단연 눈에 띄었던 건 니진스키의 분신이 되어 화려한 몸놀림을 보여줄 때였다. 부드러운 동작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짐으로 인해 춤선의 아름다움이 돋보여 춤을 출 때는 정말 좋았는데, 다양한 배역을 맡아 무대에 등장함으로써 만날 수 있었던 연기가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을 통반했던 관계로 연습을 통한 보완이 급선무라고 여겨졌다. 어색한 대사톤과 부정확한 발음 수정이 시급해 보였다.
미소 로몰라는 사랑스러운 생명체 그 자체였다. 덕후 중의 덕후인 성덕(성공한 덕후)의 진면목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맞닥뜨리게 되니 부럽고 또 부러웠다. 니진스키 덕후임을 본인 앞에서 끝도 없이 어필하며 말을 쏟아낼 수 밖에 없었던 순간도 공감대를 형성하게 도왔다. 귀여운 주접쟁이였던 로몰라가 동경해 왔던 인물의 아내가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함께 부른 듀엣곡 '꿈'도 인상깊었다.
하지만 성덕으로 이어진 길이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었으므로, 결혼 후 한층 더 성숙하고 단단해진 미소 로몰라의 변화 역시도 눈에 쏙 들어왔다. 뮤지컬 <니진스키>에서 주어진 로몰라의 역할과 비중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미소 배우가 들려주는 로몰라의 서사는 확실했기에 보다 집중해서 바라볼 수 있었다. 풀네임은, 로몰라 드 풀츠키.
승안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이 만든 음악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할 뿐만 아니라 선을 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특성이 도드라진 작곡가의 모습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로 인하여 확인할 수 있었던 솔로 넘버 '경계'의 강렬함이 대단하긴 했는데, 공연에선 아무래도 사족처럼 느껴졌던 곡이라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승안 스트라빈스키의 일취월장한 노래 실력에는 박수를 보내게 됐다. 에어 피아노 연주도 리얼해서 소름이 돋았다.
이 작품에서 발레와 함께 감상이 가능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던 것에 비해 "봄의 제전"은 듣는 것만으로도 기이함이 전해져 와 독특하고도 신선한 음악임을 알 수 있었다.
종구 디아길레프는 무대에 나타난 순간부터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장본인이었다. 롱코트로 완성된 눈부신 착장이 위엄있는 면모를 선사하는 것이 압도적이었다. 발레뤼스 창단과 더불어 탁월한 재능을 지닌 예술가들을 알아보는 선구안이 니진스키를 불러들임에 따라 만나볼 수 있었던 이야기에 드라마틱함이 더해줬던 것은 김종구 배우가 지닌 역량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니진스키가 원하는 춤을 추게 해주겠다는 말로 단번에 잠재력을 이끌어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그저 말이 전부가 아닌 사람이었기에 대단함이 절로 느껴졌다. 그렇게 춤을 통해 성장해 나가던 니진스키는 눈부시게 빛났고, 디아길레프는 사랑에 빠졌다. 여기서 디아길레프의 사랑은 사람을 향한 진심도 없지 않았겠지만 천재가 소유한 재능에 더 깊이 마음을 빼앗겼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원영 니진스키가 다가와 손으로 한쪽 팔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원하는 것을 말하자 디아길레프의 입꼬리는 귀에 걸릴 듯 높이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함에도 안무가 니진스키의 데뷔와 발레뤼스의 성공을 위하여 "봄의 제전"만큼은 그에게 모두 맞추라고 지시를 내리는 모습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어 감탄사를 내뱉게 되었다. 즉, 필요한 건 내가 다 해줄게, 라는 한 마디로 요약이 가능했던 후원자 디아길레프였다. 공연 타이틀 아이디어 낼 땐, 핏덩이 발레를 줄여서 핏발레라며 애드립을 쳐서 웃음이 빵 터졌다.
이와 함께 발레뤼스로 바슬라프를 데려올 때 확인할 수 있었던 당당함을 포함,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겠다던 이들에게 내뱉던 카리스마 넘치는 경고의 외침 또한 제작자로의 위엄을 제대로 표출하기에 충분했다.
연기는 물론이고 오래간만에 라이브로 듣는 넘버 소화력은 특히나 환상적이었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며 부르던 '기억'을 통해 쏟아져 나오던 애절한 감정이 심금을 울렸다. 공연장에서 볼 땐 자리가 2층이었어서 자세한 표정까진 확인하지 못했는데 생중계로 다시 만났을 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보게 되니 마음이 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 말미에 맞닥뜨리게 된 키스신도 서서히 이루어진 암전과 함께 잔잔하게 표현돼 멜로디에 어울리는 애틋함이 피어올랐는데 생중계에선 수위가 조금 더 높아진 상태였어서 깜짝 놀랐다. 페어나 공연날에 따른 차이도 있겠다 싶긴 했다.
'게임을 즐겨'에서 말도 안 되는 게임으로 바슬라프에게 자신감을 북돋아주고 스트라빈스키와 우정을 나누던 모습, 게임을 위해 와인잔을 뒤집어 손으로 탈탈 털어내 비워내던 디테일마저도 의미심장해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곡은 디아길레프의 흑화가 진행되던 넘버였다. 니진스키가 로몰라와의 결혼을 통보하자 '네가 가진 것'을 부르며 흑화하던 찰나는 핏빛 조명과 어우러져 자신의 뜻을 거스른 자의 모든 걸 뺏어버릴 것을 예고하며 공포감을 자아냈다. 왈츠를 추면서 니 춤을 죽이겠다고 노래하던 종구 디아길레프의 카리스마는 압권이었다.
원영 니진스키는 연기, 노래, 춤의 3박자를 고루 갖춘 뮤지컬 배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스와 니진스키가 거울 앞에 있는 것처럼 마주 보고 서서 같은 동작을 보여줄 때 합이 딱딱 맞는 것도 흡족함을 더했다. 디아길레프가 천재를 알아보는 재능이 있다고 말하자 손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데 그 뻔뻔함이 밉지 않았다. 로몰라가 자신의 정체를 안다는 걸 깨닫자 두 발을 발레하듯이 천천히 움직이며 곁을 지나쳐 가는 모습도 웃음을 자아냈다.
시원한 고음과 힘 있는 성량을 뽐낸 가창력 안에서 춤을 통해 살았던 천재 발레리노의 생애가 스펙타클하게 담겨 공연장을 울렸다. 가벼운 점프와 안정적인 착지를 통해 곧게 뻗어나가던 춤선은 화려하진 않지만 기본기가 다져진 발레 동작으로 눈을 사로잡았다.
천재 무용수의 내면을 심도있게 보여주기보다는 그저 겉핥기 식으로 훑어보는 선에서 그친 작품이었지만, 세심하게 극으로의 몰입을 높여주는 디테일을 첨부해 자신만의 캐릭터를 구축해낸 정원영 배우의 열연으로 인하여 '어디에나'가 흘러나올 땐 모든 게 다 좋아져 있었다. 공연 전체를 아우르는 메시지를 함축시킨 엔딩곡이기도 하고, 여운을 간직하게 해주는 넘버였어서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웠다. 발레뤼스와 디아길레프를 통해 깨어난 춤의 시작과 끝을 경험하게 해준 극임은 분명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커튼콜에서는 기립박수와 함께 배우들을 기쁘게 맞이했다. 미소 로몰라는 무대에 등장해서 바라 본 객석의 광경을 보고 급기야 눈물을 터뜨렸는데, 그걸 보는 나까지 눈시울이 뜨거워져 결국에는 울고 말았다. 초연이라 응원하는 마음이 한가득인데 극은 아쉽고, 배우들은 잘해서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어쩌다 보니 쓴소리가 대부분인 리뷰가 됐지만 정작 공연장에선 재밌게 잘 보고 기립도 하고 만족스럽게 퇴장을 했다. 뮤지컬 <니진스키>가 아니라 디아길레프가 되어버린 것이 흠이긴 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위의 포스터는 공연 속에서 디아길레프가 그린 니진스키로 잠시나마 등장을 한다.
재밌었던 건, 작품 안에서 엿볼 수 있었던 안무가 니진스키의 "봄의 제전"은 지금 봐도 난해한 발레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를 많이 앞서 나간 인물이라는 점에 동의를 표한다. 하지만 그래서, 틀에 박힌 발레가 아니라서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 나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발레가 영상으로 남아있지 않은 점은 매우 안타깝다.
이 작품의 제작사인 쇼플레이는 뮤지컬 <니진스키>에 이어 디아길레프, 스트라빈스키를 소재로 공연을 올려 발레뤼스 3부작을 완성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이제 겨우 하나의 공연만 봤을 뿐이지만 이걸 굳이 3부작으로 나눠 올리려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게다가 이미 뮤지컬 디아길레프는 본 것 같고요?
근데 뭐 올리겠다고 발표를 했고, 나머지 두 작품이 남았으니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 나갈지 지켜봐야겠다. 하지만 기대는 안 하려고 한다. 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알아서 정보를 수집하며 궁금증을 채워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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