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프라이드 :: 1958년과 2008년의 이야기가 2019년, 현재를 돌아보게 하다
연극 <프라이드> 사연 두 번째 관람은, 지체하지 않고 다음날 바로 계속됐다. 프리뷰 할인으로 예매가 가능했던 데다가 전캐스트를 빠르게 만나볼 수 있는 스케줄이었으므로 큰 고민없이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을 향해 움직였다.
사연이 시작되는 주말 첫째날 낮공 안내방송은 올리버, 둘째날 밤공 안내방송은 실비아가 맡아 공연 전부터 아련함을 경험하게 도왔다. 극 중 대사를 재치있게 녹여낸 멘트부터 역시나 작품에 빠져들도록 기획됐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 조금은 결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연극 <프라이드> 사연을 만나게 돼 흥미로웠다. 캐스팅된 배우들이 선보이는 연기와 극의 변화가 이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오히려 신선한 자극이 돼서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이날의 시간은 그리운 작품에게 다가감으로 인해 마주할 수 있었던 향수가 아닌, 익숙함에 곁들여진 이들을 깨우는 낯선 시선이 새로운 활기를 전하는 공연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했다.
[CAST]
필립 : 김경수
올리버 : 이정혁
실비아 : 신정원
남자 : 우찬
사연 첫공 리뷰에 모든 걸 쏟아부었으니 오늘은 간단하게 캐릭터 감상평만 이야기하고 넘어가도록 노력해 본다. 경수 필립은 뮤지컬에서 자주 만났으나 연극에서는 처음 보는 거였어서 궁금함이 앞섰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이날 공연에서 가장 마음을 움직였던 것도 경수 필립이었으니 말 다한거다. 특히, 1막 1장의 여유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배우 특유의 대사톤이 작품과 잘 맞아 떨어져서 만족스러웠다.
특히, 올리버를 억지로 밀어내며 진심과 반대되는 말과 행동을 이어가는데 그 속에 깃든 필립의 아픔이 오롯이 전해져 와서 슬펐다. 1958년의 필립에게 남겨진 공허함이 안타까움을 자아낼 뿐이었다. 1막 5장에서 암전이 이루어지는 동안 들려오던 필립의 울음소리와 2막 4장에서 올리버를 잊기 위해 의사와 상담해 나가던 와중에 양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끊임없이 만지며 안절부절 못하던 장면 또한 인상적이었다.
2008년의 필립은 모든 감정을 속으로 삼키지 않고 겉으로 분출하며 사랑꾼 면모를 보여주는 점이 재밌었다. 오직 지금, 곁에 있는 올리버를 위해 살아온 것만 같은 필립이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달달함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아흔 다섯에 파티해 달라던 올리버에게 이 퍼레이드에 또 같이 오자는 말로 화답하던 필립은 사랑이었다. 올리버에게만이 아닌, 그날의 공연을 본 나에게도.
정혁 올리버는 귀를 기울이게 하는 목소리가 분위기를 이끄는 강점이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1막 1장 속 델포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좋긴 했지만 확실히 1958년보단 2008년의 올리버가 더 잘 어울린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덧붙여, "ㅅ"발음의 보완이 시급합니다......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 존재했던 게 사실이긴 하나 캐릭터 연구를 많이 한 것이 느껴져서 앞으로가 기대됐다. 2막 5장의 퍼레이드가 한창인 그곳에서 필립과 화해하고 난 뒤, 우리 안 헤어졌다면서 신나게 외치던 모습이 귀여웠는데 딱 자신의 나이대를 드러내는 앳된 모습이 매우 잘 어울렸다. 물론, 그 순간 발생한 부끄러움은 필립의 몫이었지만 별로 중요치 않아 보였던 것도 마찬가지.
정원 실비아는 1958년을 연기할 때의 우아함이 감명깊게 다가왔다. 잔잔한 목소리의 울림이 말을 할 때마다 실비아에게 내재된 고독까지 함께 표현됨에 따라 감탄을 거듭하게 했다. 반면에 2008년의 실비아는 마치 감정이 극에 달한 것처럼, 붕 떠 있는 분위기가 대부분이었어서 감정 조절이 시급해 보였다. 그치만, 2막 5장에서 "배우의 성대란 이런 것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정말 좋았다. 여배우 말고, 그냥 배우라는 말이 문득 생각이 나서.
우찬 남자, 피터, 의사는 그야말로 3인 3색의 개성을 선사했다. 그중에서도 우찬 남자일 때 직업의 만족도와 자부심이 확연히 두드러져 눈에 띄었다. 모자를 벗었을 때 예쁘게 세팅된 헤어스타일이 시선을 집중시켰던 것도 포인트 중의 하나였다. 별다른 감정없이 연구에만 몰입하는 의사의 모습도 필립과 정반대라 사무적으로 보여졌던 것도 돋보였다.
2막 5장과 함께 눈 앞에서 맞닥뜨린 결말은 역시나 프라이드다웠다. 1958년의 실비아가 속삭이듯 말을 건네던 다정한 위로에 울먹이던 2008년 필립의 모습까지 눈에 들어오자 순식간에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시대를 뛰어넘는 위로가 1958년, 2008년은 물론이고 2019년의 지금까지 감싸 안아줘서 기뻤다. 무지개빛 조명의 반짝거림 역시도 아름다웠던 한때였다.
커튼콜에서 올리버, 실비아, 필립이 벤치 뒤에 선 남자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힘으로써 모두가 함께 미소짓던 장면도 최고였다. 그리고, 경수 필립이 꼭 잡고 있던 정원 실비아의 손에 입을 맞춘 장면 역시도 말해 무엇하리.
보고 나면 정말로 다 괜찮아지는 연극 <프라이드>. 아직은 완벽하다 말할 수 없으나 조금씩 가까이 와 닿을 거라는 믿음을 전해줬으므로, 박수치며 보내주게 돼 행복했다. 일단 전캐는 찍었으니 다른 조합으로도 봐야겠다 싶은데, 180분의 장벽을 극복해 나가는 일이 나이 먹을수록 힘겨워져서 고민이다. 사실 전캐 보고 자막하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되지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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