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프라이드 :: 여전한 텍스트의 힘, 그리고 변화

연극 <프라이드>가 사연으로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 다시 돌아왔다. 초연부터 꾸준히 봐온 작품이라서 이번 공연 역시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관람하고 왔다. 바로바로, 사연 총 첫공을 예매해서 다녀왔다는 사실!


1958년의 필립, 올리버, 실비아와 2008년의 필립, 올리버, 실비아의 시간이 교차함에 따라 만날 수 있었던 이야기는 연극 <프라이드>가 지닌 텍스트 고유의 힘을 다시금 경험하게 만들며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시간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게 도왔다.


과거와 현재의 시대적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같은 이름을 지녔으나 서로 다른 인물들의 삶 속 고뇌가 마음 깊이 스며들며 나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끔 이끌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성소수자들의 사랑과 성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이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를 향한 자부심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이정표를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1958년과 2008년, 50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과정 속에서 그들이 들려주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기울일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였다. 어느 것 하나 흘려버리기 아쉬운 대사들의 집합체로 이루어진 공연이었기 때문에. 특히, 시대를 오가는 동안 확인하게 되는 명대사의 연결고리와 흐름 역시도 완벽해서 매번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곤 한다.


그런데, 사연에 와서 달라진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의문이 앞섰다. 초재삼연까지는 과거를 1958년, 현재를 공연이 진행된 연도로 표기해 2014, 2015, 2017년으로 명시했던 것이 사연에 와서 갑자기 2008년으로 돌아간 것이다. 


2019년의 대한민국은 확실히 예전과 같지 않다는 걸 알기에 고민이 많았을 테다. 그러한 이유로 지금이 아닌 연극 <프라이드>가 영국에서 초연되던 해인 2008년을 현재로 설정한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했는데, 제작진의 영악하면서도 안일한 선택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우리나라에서만 벌써 네 번째로 공연이 올라온 만큼 연극 <프라이드> 역시도 다소 낡은 극의 반열에 올랐음을 인정하면서도, 좋은 작품을 놓치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마음을 은근히 표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극의 메시지에 힘입어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랐건만, 일보 전진이 아닌 후퇴를 선택한 것만 같아 일말의 씁쓸함이 감돌았음을 밝히는 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다. 연극 <프라이드>가 건네는 위로와 자긍심은 여전했으니까. 다소 자극적이라고 여겨졌던 1막 5장 속 장면의 순화와 곳곳에서 발견하는 것이 가능했던 대사의 수정은 특히나 마음에 들었다. 공연의 막이 내린 후, 커튼콜 시작에 앞서 이루어진 암전 속에서 빛을 밝히던 2019, 숫자 네 개 역시도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이것이 최선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 


극을 온전히 처음 맞닥뜨린 것이 아니라서 예전에 비해 재미와 감동은 덜했지만, 오히려 텍스트의 가치가 마음을 더 깊이 울렸던 한때였기에 보길 잘했다 싶었다. 프라이드는 역시, 프라이드였다.



[CAST]

필립 : 김주헌

올리버 : 이현욱

실비아 : 손지윤

남자 : 이강우


사연으로 마주하게 된 연극 <프라이드> 속 배우들이 전부 뉴캐스트로 구성된 점 역시 흡족함을 더했다. 설익음이 전하는 색다른 분위기 안에 일렁이던 낯설음과 신선함이 의외로 괜찮았어서, 합만 딱딱 맞아 떨어졌더라면 정말 좋았을텐데, 그게 아니라서 만족감이 끝까지 차오르진 못했다. 


주헌 필립은 매번 TV에서만 보다가 무대에서 처음 만났는데 한 마디를 내뱉자마자 예상했던대로 목소리만으로도 캐릭터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서 기대감이 컸다. 그런데 분노한 상태에서 대사를 치자 버벅거림이 생겼고, 이로 인해 몰입감이 떨어져 안타까웠다. 묘하게 "ㅅ"발음이 새던 것도. 


그러나 1958년이라는 시대에 걸맞는 인물의 전형성을 확연히 드러내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 했다. 진실하게 자신을 내보이기 불가능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꾹꾹 누른 채로 살아가기 바빴던 필립을 바라보는 일이 애처롭기 그지 없었다. 2008년의 필립은 50년 전과 많이 달랐는데, 2막 5장에서는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에 수줍음이 더해져 올리버를 바라보는 일이 때때로 벅차 보이는 점이 인상깊었다. 


현욱 올리버는 눈물이 많고 여린 심성이 드러날 때마다 마음을 아리게 했다. 2층 좌석에 앉았는데도 올리버의 눈물이 흘러 내리는 순간을 포착하게 돼 놀라웠다. 1막 4장에서 맥주를 흡입하는 실비아에게 외치던 "원샷은 건강에 좋지 않아!"와 2막 3장에서 실비아와 마리오 얘기를 하다가 슈퍼마리오 게임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도 모자라 BGM을 따라 부르며 "신나신나신나"를 열창하던 장면은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실비아에게 "같이 해."라고 말했던 것도. 삼연 때 올리버들이 입었던 꽃무늬 가디건 의상을 사연에서 또 보게 된 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지만 말이다. 그건, 올리버 잘못이 아니니까. 



극이 흘러갈수록 긴장감이 해소되는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1막 1장의 첫 장면에서 감지된 어색함을 잊어버리게 만들진 못했다.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했던 필립과 올리버의 대사 핑퐁이 제대로 흘러가지 못한 것이 치명타였다. 서로 자신의 대사 치기에만 급급해 주고받는 호흡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실비아가 등장해서야 겨우 균형이 맞춰지는 분위기가 형성돼 이로 인한 완급 조절은 필요해 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1958년 속 둘의 감정이 무르익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이날 공연에선 필립과 올리버보다 남자와 피터가 더 시선을 사로잡았다. 강우 남자의 프로페셔널한 직업정신, 해리 삼촌에 대한 추억과 현실을 오고 가는 상황 속에서 드러나던 편집장 강우 피터의 이중성이 돋보였다. 의사도 괜찮긴 했는데 이때는 대사를 좀 빠르게 치는 감이 없지 않아서 말하는 속도만 좀 줄여주면 훌륭하겠다 싶었다.


결론적으로 가장 좋았던 건 지윤 실비아였다. 연극 <프라이드>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로, 이 작품의 메시지 뿐만 아니라 중심인물들을 아우르는 존재라는 점에서 등장을 기다리게 된다. 1958년의 실비아와 2008년의 실비아의 개성이 또렷하게 와닿는 점이 압도적으로 좋았다. 그리고 1막 3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침묵의 신전, 실비아의 꿈 이야기에 비로소 공감이 갔기에, 예전보다 더 이 극과 캐릭터에 닿았다고 느꼈다. 


2008년 실비아의 카리스마는 실로 대단했고, 올리버와의 티격태격이 때때로 거칠지만 다정스러움이 묻어나 둘의 막역한 사이를 쉬이 짐작하게 했다. 2막 3장에서 현욱 올리버의 요청에 따라 함께 춤을 추는데 심지어 잘 춘다. 1막 4장에서 올리버의 냉장고를 채워주며 이탈리아 노래를 거침없이 부르던 목소리도 웃음을 자아냈다.


엔딩에 다다라 맞닥뜨린 필립을 위한 실비아의 편지는 따뜻한 위로 그 자체였다. 언제 들어도 계속 듣고 싶어지는 그 말의 온도가 이날도 어김없이 마음을 스르르 녹였다. 



여전한 텍스트의 힘과 점점 더 달라지는 세계의 변화로 인해 나 역시도 이전과 같지 않음을 알게 해준 연극 <프라이드>와의 시간이었다. 좋은 극인데, 인터미션을 포함해 180분의 러닝타임을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왕 바꾸는 거, 공연시간도 좀 줄어들기를 원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관객의 입장에선 이 부분이 가장 절실한데 말입니다. 


덕분에 평일 관람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그나마 수요일은 30분을 당겨서 7시 30분에 공연을 시작하지만 역시나 힘들어서, 프라이드는 주말만이 답이다. 대신에 좌석마다 방석까지 깔아두는 배려를 선보였으나 음......딱히 성에 차진 않는다.


그러니 건강을 생각해서 적당히 보려고 한다. 연극 <프라이드>가 공연 외적으로도 관객에게 닿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많은 시간이 될 것임을 알기에. 덧붙여, 배우들에 대한 걱정은 안 한다. 나는 그들에게 닿을 준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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