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더 픽션 :: 한 권의 책으로부터 시작된 운명적 이야기가 펼쳐진 세계를 마주하다
주말을 맞이하여 뮤지컬 <더 픽션> 재연을 대학로 티오엠씨어터 1관에서 만났다. 이로 인해 초연과는 또다른 분위기를 경험하며 한 편의 이야기에 다시금 빠져드는 것이 가능해서 매우 반가웠다.
처음 보는 공연이 아니었으므로 핵심내용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상태였지만, 익숙함 속에 곁들여진 새로움이 환기를 불러 일으킴에 따라 몰입감을 더하는 점이 좋았다. 재연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추가된 넘버와 스토리적 개연성이 보다 매끄러운 전개를 이어나가며 극적 재미를 선사했던 점 역시도 눈여겨 볼만 했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믿게 해준 작품으로써 뮤지컬 <더 픽션>은 글의 힘을 말하는 공연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누군가를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됨에 따라 소설을 집필한 그레이 헌트와의 만남이 작가의 이야기를 아꼈던 독자 와이트 히스만에게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으므로.
와이트가 일하는 신문사에 연재되던 그레이의 소설 "그림자 없는 남자" 속 주인공 블랙이 현실에 등장함으로 인해 맞닥뜨리게 된 사건이 가져온 파장은 엄청난 충격을 불러 일으켰고, 그로부터 비롯된 인물들의 선택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안겨주며 진정한 삶의 가치를 일깨웠다.
험난한 인생 속 한 줄기 빛이 되어준 책을 끌어안고 살았던 어린 소년이 신문자 기자가 되어 나타나 무명 작가에게 연재소설을 권유하며 모든 걸 담당하는 편집자로 관계를 이어나가는 모습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원작을 신문 연재에 맞는 글로 탈바꿈 시켜 나가는 시간 속에서 우정을 쌓아나가는 순간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림자 없는 남자"의 회차가 거듭될수록 독자들의 외면과 평론가들의 혹평이 이어지자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향해 나아가고야 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와이트를 지켜주는 것이 그레이의 글과 진심이었다는 점에서 뮤지컬 <더 픽션>의 묘미가 살아나 깊은 여운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했다.
와이트와 그레이, 두 사람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기에 더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결말이 이제는 비극이 아닌 희망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CAST]
그레이 헌트 : 박유던
와이트 히스만 : 유승현
휴 대커 : 김준영
유덕 그레이와 승현 와이트는 초연 때 본 적이 있으나 이렇게 페어로는 재연에서 처음 만나는 거라 호기심이 앞섰다. 그런 이유로 두 배우가 붙으면 어떤 시너지가 뿜어져 나올지 궁금했는데, 역시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아 만족스럽게 보고 나올 수 있었다.
자신의 팬이자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이야기를 써내려갈 힘을 실어주는 와이트를 향한 애정이 돋보이는 유덕 그레이는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했다. 그의 집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 미소 지으며 포옹하던 장면이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와이트의 턱과 충돌하는 것도 모르고 두 팔로 그를 꽉 안아주었을까 싶었다. 덕분에 와이트는 턱을 어루만지며 아픔을 애써 참았다고 한다.
참된 작가이자 올바른 인성을 지닌 인물이었으나 창작의 고통에 짓눌려 지친 얼굴 속에서 오랜 시간 무명으로 살아 온 날들이 오버랩돼 안쓰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와이트가 건네는 유혹에 빠질 법도 한데, 자신의 사명을 간직한 채 잘못된 길로 발걸음을 옮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 무척이나 감명깊게 와닿았다.
이와 함께, '소년의 밤'이 울러펴지던 무대 위의 찰나가 마음을 두드렸다. 재연에 추가된 넘버로 마음을 사로잡았음은 물론이다.
승현 와이트는 초연에 비해 훨씬 다정한 캐릭터적 면모를 선보이며 색다른 분위기를 뽐냈다. 그레이에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덕심을 마구 표출하는 공연 초반에는 순둥함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역시나, 클라이막스에 달할수록 숨겨둔 본능이 악의 기운을 등에 업고 극적으로 드러남에 따라 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나 싶다. 의자에 힘겹게 앉아 있는 그레이 옆으로 다가와 작가님의 어깨에 손을 올린 상태에서 매섭게 몰아붙이던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그레이의 등 위에 선물이라며 책 한 권을 살포시 얹어 놓을 때는 귀여웠고, 오히려 작가보다 편집자가 더 일 중독에 빠져 연재소설에 매달리던 장면은 그에게 있어 "그림자 없는 남자"의 의미를 극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함에 따라 관심을 집중시켰다. 사이좋게 가위바위보를 할 때도 좋아 보였는데, 이미 내용을 아는 상태였어서 마냥 웃고 바라보기는 힘들었다.
선에서 악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음으로 인해 잔혹해져야만 했던 와이트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기에, 그로 인한 슬픔이 몰려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와이트의 곁에 그레이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덧붙여 와이트와 그레이의 행복한 한때를 돌이켜 보면 재밌는 에피소드가 참 많았다. 특히 승현 와이트는 성공한 덕후를 대변하면서도 편집자로의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관계로, 그레이를 압박하며 원하는 글을 받아내는 일이 수월해 보이기까지 했다. 작가님이 매우 짠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나 할까?
준영 휴는 막중한 책임감을 지녔기에, 맡은 바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형사 캐릭터에 제격이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박력과 넘버 소화할 때의 카리스마가 좋았고, 블랙일 때의 변화도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날 처음 만난 건 준영 휴 뿐이었는데 앞으로 무대에서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바라게 됐다.
그리고 은근히 세 사람의 목소리가 닮아있어서 이 점이 귀를 귀울이게 했다는 점도 밝힌다. 화음을 쌓아가는 과정 속에서 한 사람 같은 순간이 존재해 흥미진진했다.
대학로 TOM씨어터 1관의 객석 단차는 워낙 유명해서 무대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며 공연을 즐기기에 딱이었다. S석 첫줄 중앙 블럭에 앉았는데, 초연 때 확인하지 못했던 회전무대가 눈에 쏙 들어와 즐거웠다. 시계를 연상시키는 무대 장치의 움직임도 볼만 했다.
공연 러닝타임이 90분 정도로 길지 않지만, 그 안에서 모든 이야기를 구현하며 커튼콜까지 완벽하게 마무리를 하는 점이 뮤지컬 <더 픽션>만의 매력이었다. 때때로 늘어진다 싶은 부분이 있는 건 여전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전 후 막이 올랐을 때 펼쳐진 커튼콜에서 마음에 전해지는 여운으로 괜시리 찡해져 눈물이 차올랐으니, 수정과 보완을 거듭한 재연의 성과를 확인할 수 있어 그거면 됐다 싶었다.
커튼콜에서 퇴장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하던 그레이의 시선이 머리 속에 남았다. 여기에 '그림자 없는 남자'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로 발걸음을 옮기며 또다른 이야기를 써내려갈 와이트의 미래가 눈에 선해 마냥 슬프진 않았다.
'문화인의 하루 > 공연의 모든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극] 프라이드 :: 1958년과 2008년의 이야기가 2019년, 현재를 돌아보게 하다 (0) | 2019.06.06 |
---|---|
[연극] 프라이드 :: 여전한 텍스트의 힘, 그리고 변화 (0) | 2019.06.03 |
[창작가무극] 나빌레라 :: 발레와 함께 날아오른 덕출의 꿈을 만나게 해준 웹툰 원작 뮤지컬 (0) | 2019.05.11 |
[뮤지컬] 시데레우스 :: 진실을 찾아 나선 두 사람 사이에서 빛나던 별을 만나다 (0) | 2019.05.01 |
[뮤지컬] 해적 :: 찰랑 페어를 볼 수 있었음에 감사, 매우 감사! (임찬민, 랑연) (0) | 2019.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