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엑스칼리버 :: 아비의 죄로부터 시작된 모르가나의 비극이 작품을 살렸다

올해는 아더왕의 전설을 재해석한 공연이 두 편이나 무대에 오르며 각기 다른 장단점을 선보였다. 뮤지컬 <킹아더>가 첫번째 주자였고, 그 뒤를 이어 뮤지컬 <엑스칼리버>가 현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 중이다. 


그중에서도 뮤지컬 <엑스칼리버>는 EMK의 새로운 창작 초연이라는 이유로 제작 과정을 포함해 공연과 관련된 정보가 하나 둘씩 공개될 때마다 정성을 쏟아부은 티가 많이 나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막상 관람을 해보니 이에 미치지 못한 부분이 더 많아 실망감을 경험해야 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참고로, 이제부터 써내려갈 내용에는 다량의 스포일러가 방출될 예정이니 공연을 볼 예정이라면 더 이상 읽지 않고 넘어가기를 바란다. 스포의 양이 장난이 아닐 것임을 미리 밝힌다. 



뮤지컬 <엑스칼리버>는 색슨족의 침략에 이어지는 왕들의 내전으로 말미암아 계속되던 전쟁 속에서 우더 펜드래곤 왕이 사망함에 따라 이루어진 멀린의 계획으로, 왕족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지내왔던 아더가 새로운 왕이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멀린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깨닫게 된 아더는 엑스칼리버를 뽑아 영국의 왕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색슨족에 대항하기 위해 절친한 관계이자 탁월한 능력을 지닌 기사 랜슬럿과 카멜롯을 건설해 위대한 여정을 펼쳐 나가고자 고군분투하던 사이에 기네비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때 아더의 이복남매 모르가나는 영문도 모른 채 수도원에 갇혀 살았던 20년의 인생을 마무리하고 탈출의 기회를 잡아 복수를 향하여, 멀린과 아더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판타지스러움으로 가득한 아더왕의 전설을 뮤지컬 <엑스칼리버>는 백분 활용하며 놀라움을 자아냈다. 특히, 마음 속에 잠재된 용의 기운을 다스리는 방법을 멀린이 알려주던 장면은 압권이었다. 무대 위에 실제로 용을 구현해냈던 것이다! 스크린으로 용의 모습과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이렇게 만나보게 될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랐다. 사실 처음 볼 땐 웃음이 좀 났는데 판타지 뮤지컬에 어울리는 연출이었던지라 자꾸 생각이 났던 만큼, 의외로 공연 속 명장명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도 남았다. 아버지의 이름부터 펜드래곤이었으니 말 다한 거 아닐까 싶고. 


제작사 특유의 강점으로 자리잡은 무대의 웅장한 비주얼과 화려한 장치 또한 만족스러움을 자아냈으며 캐릭터별 의상도 예뻤다. 하지만, 색슨족과의 전투 장면은 예상보다 초라하게 느껴졌다. 조명으로 극적인 요소를 더했으나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참고로, 공연 관람 후 가장 아쉬웠던 점이 스토리 전개였다는 게 포인트. 



[CAST]

아더 : 카이

랜슬럿 : 박강현

모르가나 : 신영숙

멀린 : 김준현

기네비어 : 김소향

울프스탄 : 이상준 

엑터 : 조원희


그 와중에 배우들은 참 잘해서, 마음이 조금 슬퍼졌다. 엑터 역의 조원희 배우는 아더의 양아버지로 따뜻함을 전해줬고, 울프스탄 역의 이상준 배우는 색슨족 왕에 걸맞는 풍채로 공포를 건네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와 함께 앙상블 배우들의 활약도 대단했다. 다만, 공연을 보면 '왕좌의 게임'이 생각날 거란 기사의 예측은 빗나갔다. 오히려, '아스달 연대기'가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고야 말았으니. 


아더는 용의 기운을 가진 자로, 불같은 성정이 곳곳에 드러나 유전자의 힘을 무시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확인하게 했다. 마법을 부리는 것보다도 더. 여러모로 철부지 같은 면모가 엿보이던 순간에선, 그저 운명이란 두 글자에 몸을 맡긴 아더의 모험이 위험천만하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이로 인하여 아더 왕의 성장기가 두드러지긴 했으나 그게 다였다. 그래도 카이 아더의 열연은 훌륭했다. 단단한 목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감정의 요동침이 캐릭터에 개연성을 부여해줘서 마음에 들었다.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살은 좀 쪘으면......온 몸에 살이 쪽 빠져서 얼굴까지 역삼각형이 되어버린 아더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 고생을 많이 한 캐릭터로 비춰졌다. 


박강현 배우는 진짜 오래간만에 만나게 된 거였는데, 못 본 사이에 일취월장한 실력을 겸비하게 됐음을 깨달을 수 있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수염은 좀 어색했지만 예전에 비해 확실히 연기와 노래 실력을 견고히 다져나가는 때임을 알게 해줘 고개를 끄덕거리며 바라보게 됐다. 랜슬럿의 서사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지만. 


김준현 배우의 멀린도 기대 이상이었다. 장발과 수염은 물론이고 마법사이자 예언자로의 착장도 잘 어울렸다. 아더 왕을 위한 조언자이자 조력자로의 든든함이 눈여겨 볼만 했고, 카멜롯의 왕을 위하여 죽음도 불사하며 역할을 다하는 충심이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시원한 박력이 귀에 꽂히던 가창력과 강렬한 연기 역시도 감명깊었다.



기네비어는 아더와 사랑에 빠짐에 따라 180도 달라지는 캐릭터를 맞닥뜨리게 했다. 아더와 만나기 전까진 활 쏘는 솜씨가 뛰어난 궁수이자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춤으로써 마을의 다른 여인들에게 스스로 방어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리더십이 인상깊었는데, 왕비가 되면서 올곧은 당당함이 사라지고 외로움을 품은 채 조용히 살아가는 인물로 돌변해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아더를 사랑하지만, 아더가 자신을 선택한 것이 멀린이 말한 운명에 의한 것임을 알기에 고독을 견뎌내야 했던 마음이 객석까지 전해져와 안쓰러움이 몰려왔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기네비어와 랜슬럿의 관계도 아더에 의해서였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는 셋 다 잘한 건 없는 상황인 게 맞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세 사람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데, 이를 통해 마주해야만 했던 기네비어의 삶이 너무 뻔해서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궁수에서 왕비에서 수녀로 변모하는 과정에 있어, 신선함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을 보여주고자 애를 쓰긴 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공연 초반에만 이루어졌음을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어 한숨이 나왔다. 


차라리, 다시 궁수로 돌아가 그녀가 가르쳤던 여인들과 함께 멀리서 활을 쏘며 아더를 돕는 방식으로 색슨족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전투에 기여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뜻밖의 마주침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는 기네비어와 아더가 그들이 처음 만났던 시절을 떠올리며 같이 카멜롯으로 돌아간다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전우애를 다지며 색다른 엔딩을 전했으면 두고 두고 머리에 간직할 만한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즉, 단순히 방향을 바꿨다는 것에 의미를 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해줌과 동시에 완벽한 서사를 가진 캐릭터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이는 걸 기네비어로 인해 체감하게 됐던 뮤지컬 <엑스칼리버>와의 시간이기도 했다. 


김소향 배우의 기네비어는 작고 아담한 체구가 요정을 연상시켰는데, 금발까지 갖추어진 겉모습을 보고 있자니 요정 중에서도 엘프 생각이 났다. 밝은 미소가 눈부신 기네비어였으나 아더로 인해 받은 상처가 겉으로 다 표출돼서 보는 것만으로도 슬픔이 전해져 왔다. 연기도 노래도 역시나 멋지게 해내던 소향 기네비어. 궁수일 때 가장 빛났던 기네비어였기에 내 마음 속 결말 만큼은 수녀가 아닌 궁수 기네비어로 남게 될 것이다. 



앞서 길고 긴 리뷰를 풀어냈으나 진짜는 지금부터다. 뮤지컬 <엑스칼리버>에서 제대로 마주해야만 하는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모르가나였으므로. 킹아더도 그랬지만 엑스칼리버마저도 뮤지컬 모르가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예상 못했던 결론이 두 공연의 가장 큰 임팩트이자 킬링 포인트인 것만은 분명하니 이 점만은 확실히 해둬야겠다. 


모르가나는 수도원에 오래 갇혀 있다가 겨우 빠져나왔기에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와 같았다. 이복남매인 아더는 왕이 되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사랑하는 멀린이 곁을 지켜주고 있었는데 같은 피를 지닌 자신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 복수의 칼날을 겨눌 수 밖에 없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선 마음을 얻어 가까워지는 것이 먼저였기에 모르가나는 일단 미소 띈 얼굴로 아더의 호의를 받아들였지만 본심은 숨길 수가 없었다. 이런 행태는 1막의 마지막 넘버에서 카멜롯의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노래 부를 때, 오직 모르가나만이 평화로운 시간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마지막 부분에 다다라서야 건성으로 따라 부르던 장면에서 제대로 표현이 됐다. 


그후 2막에선 드디어 아더의 결혼식이 한창인 사이에 독이 든 술잔을 의도적으로 동생에게 건네며 비극으로 향하는 길에 속도감을 내게 만들었는데, 이로 인한 파장이 어마어마해서 악역다움을 뽐내는 점이 인상깊게 와닿았다. 


모르가나가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며 마법진을 그리던 장면의 신비로움은 조명의 어우러짐이 결합돼 매력적인 순간을 완성시키며 풍성한 볼거리를 경험케 했다. 



더불어 뮤지컬 <엑스칼리버>를 뮤지컬 모르가나로 불러야 한다는 외침은, 신영숙 배우의 모르가나가 '아스달 연대기'라고 여겼던 공연에 '왕좌의 게임'과 같은 카리스마적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임을 밝히는 바다.


뿐만 아니라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가 모르가나인 데다가 가장 강렬한 넘버로 귀를 사로잡은 곡 역시도 모르가나가 부른 "아비의 죄"였기에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소 늘어지는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정신을 단단히 붙잡아준 주인공이기도 했음은 물론이다. 재관람은 안 할 거지만 신영숙 배우의 모르가나는 다시 보고 싶고, 모르가나가 열창하는 "아비의 죄"만은 다시 듣고 싶어지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 


극 안에서도 아더, 기네비어, 랜슬럿의 관계보다 모르가나와 멀린이 나왔을 때의 임팩트가 강했다. 넘버도 그랬고, 두 사람이 선보인 결말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개인 포스터 속 모르가나도 최고로 멋졌다!



공연 관람 전에는 로비에 설치된 포토존을 카메라에 담았다. 뮤지컬 <엑스칼리버>는 러닝타임이 인터미션 20분을 포함해 175분으로, 거의 3시간 동안 공연이 펼쳐지는데 쳐낼 건 좀 쳐냈으면 좋겠다. 주요 배역마다 솔로 넘버가 하나씩 있어서 배우들의 열창을 감상하는 것이 가능한 것까진 괜찮았으나 풀어야 할 얘기가 많아서 어느 것 하나에 몰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게 단점으로 남았으니 보완을 해주었으면 한다. 


2층 객석에서 바라봄에 따라 무대의 전체적인 쓰임새가 한눈에 들어와 흡족했다. 아더와 기네비어의 듀엣곡도 부드러운 멜로디와 가사가 행복을 전해줘서 가끔 생각이 난다. 



덧붙여 바위에 꽂혀 있던 검, 엑스칼리버가 공연 타이틀이었던 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뮤지컬 <엑스칼리버>였다. 그 누구도 엑스칼리버를 대신할 존재감을 보여주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엑스칼리버를 뽑으면서 엇갈린 운명으로 나아가는 영웅들의 삶은 상상했던 것보다 잔혹했지만 되돌릴 수 없으니 그 길을 견고히 걷기 위한 포석을 다져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엔딩에 다다라 엑스칼리버가 자리잡았던 바위로 향하는 아더를 보고 정해진 운명이라는 말만을 믿고 그대로 따른 자신을 책망하며 검을 다시 꽂아놓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기분 탓으로 끝이 나서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던 그날의 감정도 잊지 않기 위해 끄적여 본다. 

   


이름만 쓰여진 버전의 캐스팅 보드도 한 장 찍어봤다. 배우들의 이름 위로 용과 엑스칼리버의 멋스러움이 폭발하는 찰나를 포착하게 돼 영광이었다. 이것이 바로, 왕족 가문에 흐르는 용의 피를 형상화한 모습이다.


근데 참, 아더왕의 전설과 연관된 작품을 보면 볼수록 막장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착잡하다. 킹아더와 엑스칼리버는 꽤나 다른 의미로 막장스러움을 전한 공연이었으니. 덕분에 다음으로 만나보게 될 작품은 무엇일지, 이 또한 같은 길을 걷게 될지도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마지막으로 사심을 담아, 오늘 리뷰의 끝을 담당하는 이미지 역시 모르가나로 장식해 본다. 아비의 죄로부터 시작된 모르가나의 비극이 작품을 살렸다. 이건 진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커튼콜에서 우리의 박수와 환호를 모두 가져간 주인공, 모르가나를 기억해야만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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