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아가사 :: 추리소설 작가의 실종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미스터리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임을 미리 밝힌다)

 

뮤지컬 <아가사>는 추리소설 작가의 실종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미스터리가 눈여겨 볼만한 작품이었다. 1926년 12월 3일, 아가사 크리스티가 스타일스 저택에서의 티타임 후에 자취를 감추었던 열하루를 중심으로 펼쳐지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만 이야기의 시작은 그로부터 27년 후인 1953년, 슬럼프에 빠진 작가 레이몬드 애쉬튼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반복되는 악몽 속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을 찾기 위해선 아가사 실종 사건의 내막을 떠올리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레이몬드가 아가사를 찾아가 그날의 진실을 확인하려 애쓰는 모습이 포착되며 흥미로움을 전했다. 

 

이쯤에서 다시 1926년으로 돌아가 스타일스 저택을 빠져나온 아가사는 자동차를 몰다 사고로 정신을 잃었는데, 호의를 베푼 로이 덕택에 뜻밖의 시간을 보낸다. 그 속에서 로이는 '미궁 속의 티타임' 원고를 완성하길 바라며 아가사를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한편, 레이몬드는 꼬마 탐정을 자처하며 아가사의 실종과 관련된 진상을 밝혀내고자 에릭 경감과 함께 티타임에 참여했던 사람들 위주로 탐문 수사에 나선다. 

 

 

범죄의 트릭이 아닌 살인의 동기에 초점을 맞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걸맞는 스토리 전개가 돋보인 작품이 바로 뮤지컬 <아가사>였다. 아가사의 속내를 바탕으로 디테일한 심리적 묘사를 선보임과 동시에 작가와 연관된 미스터리 사건이 선사하는 흥미진진함이 풍성한 볼거리를 전했다. 

 

아가사를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를 파헤칠수록 얽히고 설킨 욕망이 표출돼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더해 레이몬드의 활약이 대단했고, 로이가 아가사의 살의로 모습을 드러낸 점도 공연의 포인트와 다름 없었다. 

 

 

내가 본 뮤지컬 <아가사>의 캐스트는 위와 같았다. 아가사 크리스티 역 이정화, 로이 역 고상호, 레이몬드 애쉬튼 역 이준우, 아치볼드 역 정평, 폴 뉴트란 역 안두호, 뉴먼 역 무현, 베스 역 하미미, 낸시 역 정다예, 에릭 헤이츠 역 이지현이 멋진 열연을 선보여 만족스러웠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내재된 살의를 표면 위로 끄집어내 끊임없이 고뇌하는 인간의 갈등과 선택을 마주하게 해준 점이 감명깊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가사가 로이의 악랄한 본성에 먹히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스스로 내보인 결단이 두 눈을 번쩍 뜨게 만들 때가 없지 않았다. 

 

 

그 와중에 끊임없이 곁을 맴돌며 아가사에게 손을 내밀던 로이의 유혹이 너무나도 강력해서 이를 거부하기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 때가 상당했다. 고로이 같은 경우에는 다정하게 다가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끌어 내고자 조금씩 천천히 아가사의 내면을 잠식해 나가는 과정이 놀라움을 전하고도 남았다. 

 

 

이와 함께 탱고씬에서의 몸놀림과 예상을 뛰어넘는 탁월한 가창력이 압도적으로 귀에 꽂힐 때가 존재했다. 그야말로 쩌렁쩌렁 그 자체였다. 특히, 대사 중에서도 "도망치지마, 아가사 크리스티!"를 외칠 때 맞닥뜨리게 된 공포감이 대단했다. 캐릭터와의 싱크로율이 남달랐던지라 이래서 고로이 고로이 하는구나 싶었다. 넘버 중에서 독바리의 위엄이 어마어마하기 그지 없었다. 

 

 

앞서 언급한 로이로 인하여 살의가 온 몸을 휘감는 순간이 없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로 굳건히 나아간 화가산의 올곧음이 보기 좋았다. 노년의 아가사가 마주하게 해준 목소리 톤이 살짝 작위적으로 느껴졌던 걸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마음에 쏙 들었다. 

 

로이가 하이드로 호텔에서 따뜻한 차를 타서 가져왔을 때 한 입을 마셔보곤 조금 쓴 것 같다면서 로이에게 직접 마셔보게 하던 화가사의 재치도 기억에 남았다. 레이몬드의 코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며 따스한 조언을 일삼던 화가사의 온기도 잊지 못할 것이다.   

 

실종 전후에 많은 일을 겪으면서 화가사가 살의를 여전히 품에 안고 살아가기로 결심했음을 절실히 깨닫게 해줘 이로 인한 의미심장함이 도드라졌던 한때였다. 마지막으로, 뮤지컬 <아가사> 10주년 기념 공연을 축하하며 오늘의 공연 리뷰를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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