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그림과 함께 펼쳐진 사랑의 자화상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림과 함께 펼쳐지는 사랑의 자화상을 만나볼 수 있게 해준 작품이었다. 화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결혼 초상화를 당사자가 모르도록 비밀스럽게 그려내야 하는 의뢰를 받음으로써 마주하게 된 이야기는, 은근한 긴장감과 묘한 감정의 기류 속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음악을 최소화함에 따라 부각된 영상미가 돋보였고,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의 세계가 하나로 합쳐져 농밀해질수록 그림 또한 절정으로 치닫는 과정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감독 : 셀린 시아마

[CAST]

엘로이즈 : 아델 에넬

마리안느 : 노에미 멜랑

소피 : 루아나 바야미

백작 부인 : 발레리아 골리노


특히, 자연의 이미지에 따른 대비가 일품이었다. 마리안느가 의뢰받은 일을 해내기 위하여 배를 타고 섬으로 향하던 도중 화구가 물에 빠지자 직접 뛰어들어 건져낼 때 확인할 수 있었던 바다의 거친 포효와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겨우 꽁꽁 언 몸을 녹이며 온기를 되찾게 된 마리안느 주변을 감싸던, 불의 열기가 인상깊었다. 그리고 바다를 갈망하며 거침없이 물 속으로 뛰어들던 엘로이즈, 치마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던 엘로이즈의 모습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물과 불의 극명한 대비는 단순히 색채로 인한 차이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귓가에 전해져 오는 소리를 통해서도 맞닥뜨릴 수 있어 흡족했다. 철썩이는 파도의 움직임과 타닥거리며 타들어가던 불꽃의 일렁거림을 들리는 그대로 장면에 배치해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여기에 두 주인공이 착용한 의상 또한 같은 범주에 포함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이 담긴 작품임을 알게 됐다는 점에서 볼거리가 상당했으며, 곳곳에 포진된 상징적 의미가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마리안느의 손길로부터 비롯된 엘로이즈의 초상화가 완성될 때까지만이라고 정해진 짧은 시간이 오직 두 사람에게 주어진 전부였음을 깨닫게 되니 마음이 먹먹해져왔다. 반면에 그림이 스케치로 출발해 색을 덧입어가다 화가의 섬세한 붓터치로 마무리되는 순간까지의 과정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서서히 변화하는 찰나와 닮아 있어 이 점은 매우 흥미로웠다. 


그런 의미에서 화가가 캔버스에 초상화를 담아내는 장면을 세밀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점도 영화에 대한 만족스러움을 더해주었다. 백작 부인의 말을 따르며 비밀스레 엘로이즈를 관찰해 나가야 했을 때에 마리안느가 초상화를 위해 마련된 드레스를 본인이 입고 거울을 보며 구도를 잡아나가던 장면도 꽤나 눈여겨 볼만 했다.   



마리안느가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사이, 엘로이즈가 초상화의 모델이 되는 일을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수면 위로 떠올라 이로 인한 안타까움이 더해졌다. 수녀원에서 생활하던 엘로이즈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만든 건, 언니의 자살로 인해 찾아온 예기치 못한 인생이었으므로. 오로지 죽음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이었기에 절벽으로 몸을 던진 언니를 이해하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렸고, 언니와 달리 용기 없는 본인을 탓하며 시시각각으로 조여오는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어 외면하기에 이른 모습이 슬퍼 보였다.


뿐만 아니라 정략결혼을 수락했다는 의미로 남자 집에 예비 신부의 초상화를 보내는 결혼 초상화 제도는 여성을 철저하게 대상화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며 불합리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더군다나 결혼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초상화 모델까지 되어야 하는 일을 쉽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테니까. 사면초가에 놓인 엘로이즈가 안쓰러웠다.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제작된 만큼, 동성애에 관대한 시대가 아닐 뿐더러 앞서 언급한 결혼 제도를 포함해 여성들에게 많은 제약이 따랐던 시기를 중심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나간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다양한 에피소드와 은유는 전형성을 뛰어넘는 가치를 부여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다만, 스토리 자체는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해 아쉬웠다. 잔잔하되 지루하지 않았고 장치적인 설정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시나리오만 놓고 보자면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관람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어 특유의 부드러운 울림이 좋았고, 백작 부인이 자리를 비운 시간 동안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이 남긴 여운 역시도 어마어마했다. 조심스럽게 시작됐지만 그만큼 뿌리칠 수 없는 인연의 고리를 단단히 엮어낸 둘이 보여준 사랑의 흔적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을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외로움을 달래줄 산책 친구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초상화의 피사체로, 더 나아가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으로 발전해 나가던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만남은 필연이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엘로이즈가 초상화의 모델이 되겠다고 선언하며 마리안느가 떠나지 않도록 도왔던 장면 또한 되새겨 볼수록 의미가 있었다. 사랑을 위해 사랑을 포기한 것과 다름 없는 결정이었기에 더더욱. 



백작부인이 저택을 비운 사이에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은 점점 깊어져만 갔는데, 그 속에서 저택일을 책임지는 하녀 소피와도 유대감을 쌓으며 세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또다른 사건 속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에피소드도 곱씹어 볼만 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소피의 선택을 지지하고 곁에 머무르며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 식사 준비를 위해 앞치마를 메고 직접 요리를 하는 엘로이즈와 테이블 세팅을 준비하는 마리안느의 모습도 탄성을 자아냈다. 그런 두 사람 옆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자수를 놓는 소피의 얼굴도.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 셋이 나란히 테이블에 자리잡고 각기 다른 일에 골몰함에 따라 드러나던 표정이 아름다웠던 포스터가 그래서 더 마음에 깊이 남았다. 게다가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저 퀴어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동성 간의 사랑과 더불어 귀족, 화가, 하녀로 구분되는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우정, 여성들 사이의 깊은 연대감, 평등, 낙태 등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놀라운 시간을 선사했으니 말이다. 이를 통하여 여성의 주체성을 대변하는 작품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었다.


이와 더불어 그리스로마신화인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두고 세 사람이 나눈 대화가 영화 속에서 가장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준 대사로써 존재감을 뿜어냈다는 사실을 밝힌다. 오르페우스가 아내인 에우리디케를 뒤돌아보는 장면에 대한 의견이 전부 달라서 그에 대한 해석을 소피, 마리안느, 엘로이즈의 입을 통해 듣는 순간의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신화에 이입한 셋이 털어놓는 사랑의 정의와도 같은 기분이 들어서. 



보는 내내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했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었다. 시대적 분위기와 제도에 억압된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프랑스의 과거를 만나보는 것이 가능했는데,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주체적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려 애썼던 이들이 존재했음을 일깨워 줬기에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마리안느는 결혼에서 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화가라는 직업 안에선 자유롭지 못했다. 남성 누드 모델을 그리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고, 시간이 흘러 전시회를 열게 됐을 땐 본인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야 했다. 엘로이즈는 귀족 신분을 지녔으나 언니를 대신해 결혼 초상화를 보내 선택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으므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렇게 서로 다른 애달픔을 간직한 삶 속에서 피어난 사랑이었기에 더 값졌고,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단순한 일탈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는 시린 사랑의 순간. 예측이 어렵지 않은 결말로 가는 과정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현재에서 과거, 그리고 다시 현재로 이어지는 영화의 흐름도 훌륭했다. 불길에 휩싸인 치마자락과 이 사실을 모른 채 오로지 한곳만을 유심히 바라보는 엘로이즈의 시선이 어두운 밤 한가운데 자리잡은 여인의 쓸쓸한 자화상을 연상시키며 강렬한 분위기를 이끌어냈는데, 이때 흘러나오는 음악과 어우러지니 그야말로 환상적인 명장면이 연출되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참고로 이 순간에 감상할 수 있었던 음악은 '비발디 사계 여름 3악장'이었다. 나름대로 평온하게 이어져 왔던 이야기의 균형을 깨뜨림에 따라 몰입감을 극대화시키는 효과까지 발휘된 장면이었다. 



이 영화가 불초상이라는 애칭으로 유명해지게 된 이유도 아마 이 장면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확실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보다 부르기 간편하고 이해하기도 쉬워서 귀에 착착 감긴다. 관객들의 센스는 정말 대단하다! 


비발디 사계 중에서도 여름 3악장은 여름날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황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장면의 풍성함을 더해주는 역할로 완벽함을 선사했기에 못 잊을 것 같다. 위의 장면 외에 엔딩씬에서 한 번 더 만나보게 됐는데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예술에 담긴 사랑과 삶의 가치가 뜨겁게 타오르며 마음을 충족시켰던 불초상이었다. 많은 관객들이 영화관으로 발길을 옮김에 따라 흥행을 이어가게 돼 상영관이 추가됐다고 하니, 당분간은 이러한 관심이 지속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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