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킬롤로지 :: 세 사람의 독백이 건넨 삶의 무게
연극 <킬롤로지>는 무대 위의 세 사람이 관객들을 향하여 독백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놓으며 진행된다. 살해학을 뜻하는 단어 킬롤로지(killology)는 전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킨 온라인 게임으로 상상력을 총동원해 보다 잔혹하게 상대방을 죽일수록 점수를 많이 획득할 수 있게 제작되었는데, 게임과 같은 방식으로 한 소년이 살해됨에 따라 공연의 본격적인 막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희생양이 된 소년 데이비와 게임으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 알란, 킬롤로지를 개발한 제작자 폴이 털어놓던 현실의 삶. 그것은 게임과는 또다른 의미로 잔인한 순간을 그들에게 선사했다. 작품 속에 담긴 뒤틀린 부자 관계가 셋에게 미친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었기에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상황을 연속적으로 마주해야만 했다.
게임과 현실은 다른 세계라고 여겨졌으나 시대가 바뀔수록 경계가 모호해져 점점 더 이에 대한 구분이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다. 그렇기에, 연극 <킬롤로지>가 경험하게 해준 인생의 무게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오롯이 짊어져야 할 책임감으로 깊이 마음에 와닿았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 경고를 넘어서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작품이었다고 봐도 되겠다.
3단으로 구성된 무대에서 각기 다른 위치에 자리잡고 있던 3명의 배우는 자신만을 향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순간에 스스럼없이 독백을 꺼냄으로써 몰입감을 최고조로 높였다. 가장 먼저 확인이 가능했던 알란의 이야기는, 그의 말들 속에 극이 건네고자 하는 답이 존재함을 깨닫게 해줘 흥미로웠다.
알란은 타이밍의 중요성에 대해 조심스레 언급하고 있었는데, 다양한 종류의 타이밍 중에서도 관계의 타이밍이 연극 <킬롤로지>를 관통하는 메시지임을 알아차리게 만들며 첫 관람 때 지나쳤던 작품의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단 한 번의 잘못으로 완전히 망가진 관계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야 마는데, 그걸 모르니까. 참고로 이날은 두 번째 관람이었다.
이석준 배우의 알란은 복받치는 분노와 울분과 후회를 포함, 휘몰아치는 감정선을 통해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복잡한 내면을 완벽하게 표현하며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김승대 배우의 폴 역시 눈물을 주체하지 못함으로 인해 끓어오르는 감정을 표출해내고야 마는 캐릭터를 선보여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로 인해 알란과 폴이 대립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던 어마어마한 감정의 폭주가 실로 놀라웠다.
장율 배우의 데이비는 천진난만한 속에 잠재된 폭력성이 은근하게 고개를 내밀던 소년으로 연민과 화를 동시에 불러 일으켰는데, 대사 치는 속도가 빨라서 때때로 그것을 따라가기게 급급할 때가 있어 이 점은 좀 아쉬웠다.
독백이 대부분이긴 하나 폴과 알란, 알란과 데이비가 만나는 접점 또한 없지 않기에 이 부분에 있어서도 주목해 볼만 했다.
내가 연극 <킬롤로지>를 두 번 관람하게 된 이유는, 더블 캐스트로 이루어진 2명의 폴을 모두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특성상 알란과 데이비보다는 폴이 아무래도 배우들이 원하는 디테일을 살리는데 적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러한 예감은 적중했다.
승대 폴은 어린 시절 다정했던 아버지와의 추억을 결코 잊지 못하면서도, 기대감을 져버린 아들을 향해 적나라한 태도를 유지하는 아버지로 인해 상처를 고이 축적해 나감으로써 고독을 느끼는 인물을 섬세하게 보여줬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기에 사랑을 갈구했던 소년의 내면이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하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앞서 이야기한대로 감정을 절절하게 드러내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던 장면들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사랑받지 못함으로 인해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탄생시킨 게임 킬롤로지를 통하여 얻은 부와 명예, 이로써 예기치 못하게 닥쳐 온 위기, 훗날 에단을 입양하게 됨에 따라 폴이 경험했을 아바지로의 감정 역시 눈을 떼지 못하게 도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에게 조명이 맞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거둘 수 없게 하는 어둠 속 순간의 디테일들 또한 흥미로웠다. 연극을 통해서는 처음 만나게 됐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율폴은 승대 폴과 달리 감정이 절제된 캐릭터로 조금 더 유별난 성격이 도드라짐을 체감하게 했다. 아버지와의 좋았던 시간을 회상할 때 들려오던 어린 아이 목소리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는데, 이로 인해 행복한 부자의 추억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다만, 성장하는 동안에 기대어 부흥하지 못함으로써 모든 감정을 스스로 가둬버린 듯한 분위기를 풍겼기에 지금까지 냉소적인 삶을 살아왔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안쓰럽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중을 쉽게 꿰뚫어 보는 것이 쉽지 않아 이로 인한 공포감 또한 주변의 온도를 싸늘하게 바꾸어 버리기 충분했다.
적당히 캐주얼하면서도 정장 스타일을 잃지 않는 착장도 마음에 들었다.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서 그의 아버지가 해준 이야기 또한 이 공연의 명장면과 명대사로 깊이 뇌리에 박혔다. 남다른 개성을 지닌 두 폴을 만나게 해준 그들의 아버지. 오로지 둘만이, 새까만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이 하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어린 폴에게 그가 건넨 말들. 이 세상엔 빛이 어둠보다 더 많다던.
"원래 어둠이란 건 없어. 다 빛인 거야. 밤하늘이 어두워 보이는 건 말이다. 별들이 너무 멀리 있어서 아직 우리를 찾아내지 못해서야."
그래, 세상의 시작은 빛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둠이 존재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별들이 아직 찾지 못했을 거라는 의미심장한 말에는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거릴 수 밖에 없었다.
인터미션이 없는 극이지만 중간에 잠시 호흡을 쉬어갈 수 있게 마련된 장치로 인해 1막과 2막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도록 구성된 점이 좋았고,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조명의 색깔과 불빛의 흔들림이 넘실거리던 장면을 보는 것마저 뜻깊었다. 기울어진 거울의 의미 또한 곱씹어 볼만 했으며, 무대 위에 놓인 의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공연 전 안내방송은 배수빈 배우와 박성훈 배우가 맡았는데, 두 번의 관람으로 둘의 목소리를 전부 듣게 돼 이 또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에는 좋은 작품으로 무대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는 극이지만 공연의 대부분이 독백으로 이루어져 환기가 필요한 때가 없지 않고, 눈으로 보는 건 아니지만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상황이 연출돼서 심리적으로 힘든 작품인 게 사실이다. 나 역시 그런 이유로 고민을 하다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두 번째 관람을 하게 됐는데, 첫 관람보다 훨씬 더 이해가 잘 되고 지루함이 덜해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세 번은 못 보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게임과 현실이 경계를 허물어가는 시점에서 인간들이야말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 존재임이 분명해졌다. 3인의 독백이 전하는 삶의 무게를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직시하기를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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