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저 별을 향하여!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변화하는 세상으로 인해 오랜 고전소설을 뮤지컬로 재탄생시키며 무대에 오르던 <맨 오브 라만차> 역시 달라져야만 했다. 돈키호테가 둘시네아라고 칭송하던 알돈자를 향한 노새끌이들의 폭력적 장면이 올해부터 대폭 수정에 들어간 것이다.
스토리 전개상 삭제가 불가능하기에 많은 부분을 쳐낸 점은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순간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기사의 꿈을 간직한 채로 무모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돈키호테는 더 이상 현자가 아닌 미치광이로 보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현재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야기시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가 공연될 때마다 끊임없이 제기됐던 장면에 대한 불편함의 호소가 미투 운동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난 뒤에서야 겨우 보완의 과정을 거치게 됐으니, 이 또한 안타깝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신성모독죄를 이유로 지하감독에 끌려 온 세르반테스는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자신이 쓴 작품의 주인공 돈키호테가 되어 이룰 수 없는 꿈을 쫓는 인간의 삶을 극중극 형태로 보여준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을 위한 격려와 더불어 예상치 못한 엉뚱함으로 웃음을 자아내던 이야기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던 이유는, 꿈을 이룰 수 없어도 꿈을 향한 길을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사가 없어져 버린 시대에 그것이 되겠다고 길을 나선 돈키호테와 무작정 그의 곁에 머무는 산초의 요절복통 모험담은 때때로 황당했지만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친절한 여관주인을 만났고, 고귀한 레이디로 칭송받게 되면서 알돈자는 지금껏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꿈을 꾸게 되었으니 말이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꿋꿋히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는 기사 지망생 알론조 키하나의 행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인상깊은 시간을 경험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하감옥의 세르반테스와 라만차의 기사를 꿈꾸는 돈키호테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지만 이러한 두 명의 캐릭터를 한 명의 배우가 연기함으로써 그동안 감춰 두었던 또다른 단면을 확인하게 해준 점이 흥미로웠다. 윤공주 배우의 알돈자는 강단 있는 모습 아래서 드러나던 절절한 삶의 갈망을 통해 애달픔을 전함과 동시에 연기와 노래의 강약 조절이 매끄러워 반할 수 밖에 없었다. 결말에서 압도하던 알돈자의 대사와 그로 인한 표정 변화도 완벽했다. 김호영 배우의 산초는 돈키호테 못지 않게 좋아하는 일을 해나가고 있다는 것이 행동에서 표출돼 부러웠다. '좋으니까'를 부르며 즐거워하던 산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문종원 배우의 여관주인 캐릭터도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코믹한 연기는 생소했던 배우라서 어떨까 싶었는데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 돈키호테와 산초가 모든 것을 잃고 여관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문 열어주지 말라는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회유하고자 간지럼을 태우는 장면이 신선했다. 그리고 페드로는 악당이었지만 이준호 배우가 연기를 잘해줘서 더 미웠다. 김호 배우의 이발사도 최고였고.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현실과 그 안에서 연출되는 또다른 극을 만나게 됨으로 인해 확인할 수 있었던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만의 매력과 묘미도 볼만 했다. 짧지 않은 오버츄어 속에 작품의 모든 메시지가 음악이 되어 흐르기에, 그것을 듣는 순간부터 극을 받아들이게 되는 점도 좋았다. 때때로 돈키호테에서 잠시 벗어난 세르반테스가 자신이 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공연의 무대 배경을 포함한 관련 설명은 물론이고 곱씹어볼 수 있는 이야기까지 전달해 줘서 이 또한 재밌었다.
4명의 인물이 체스판의 말이 되어 게임의 룰대로 움직이며 웃음을 건네는 장면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재치 넘치는 장치 또한 곳곳에서 발견하게 해줘 지루할 틈이 없었던 시간이었다.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로 분해 1인 2역을 맡은 홍광호 배우는 능수능란한 노인 연기와 뛰어난 가창력으로 단숨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둘시네아'에서 동명의 가사를 내뱉을 때 앞의 두음절은 세르반테스의 목소리로, 뒤의 두음절은 돈키호테의 목소리로 바꿔 부르던 순간의 전율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몸도 참 잘 썼는데, 털기춤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나름의 안무 장면도 시선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홍동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넘버는 단연 '더 임파서블 드림'이라고 할 수 있다. 돈키호테의 신념과 세르반테스의 이상향을 담아낸 곡으로 지칠 때마다 들으면 위로를 받게 되는 곡인데 역시나 라이브로 들으니 제대로였다. 요즘 나를 꿈꾸게 하는 노랫말은 "그 꿈 이룰 수 없어도/멈추지 않고/돌아보지 않고/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저 별을 향하여!" 이 정도가 되겠다.
공연 속에서 홍동키가 "저 별을 향하여."를 외치며 별을 손으로 잡는 모션을 취하는 장면이 그래서 굉장히 와닿았다. 기사가 되겠다는 열망의 간절함을 깨달을 수 있었기에, 언젠가는 꼭 원하는 바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게 했다. 알돈자에게 "지금의 모습이 아닌 되어질 모습을 연모하나이다."라고 말하던 순간도 조금 더 깊이 공감을 불러 일으켜서 기분이 묘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꿈을 향한 도전에 대한 무모함을 걱정하면서도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희망을 전하는 극이었다. 400년 전에 쓰여져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돈키호테를 공연으로 제작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많은 이들의 호평을 자아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샛노란 해바라기와 풍차를 배경으로 말을 타고 달리는 돈키호테를 생각하게 만드는 극. 그에게 주어진 '슬픈 수염의 기사'라는 호칭 역시도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미소를 짓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함께 건강 낭비라던 단어 또한 아련하게 기억 속에 남았다.
다만, 세르반테스가 작품을 만들고 난 뒤 400년을 훌쩍 뛰어넘는 시간을 살아온 우리에게 있어 공연의 모든 찰나가 공감대를 형성하게 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밝힌다. 시대적 상황과 사람들 각자가 처한 상태로 말미암아 받아들이게 되는 장단점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른 관점의 차이를 마주하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니까. 이것은 세르반테스가 극중극을 선보일 때 직접 이야기를 한 부분이기도 하니, 그도 아마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때의 시대상이 반영된 과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변화를 꿈꾸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다. 달라지고 있지만, 더 많이 달라져야 한다.
내가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를 관람했던 날은 하나카드 컬쳐에서 문화 이벤트를 진행함으로써 뮤즈 투나잇이라는 타이틀 아래 공연이 이루어졌다. 김호영, 윤공주, 문종원 배우가 커튼콜 이후에도 무대에 등장해 세 명의 관객을 추첨하여 기프트카드를 증정했는데 호영 산초의 가방에서 마이크가 뿅하고 나타나는 것이 참 앙증맞았다.
그리고 당연히, 행운의 주인공 셋 중에 나는 없었다. 하지만 공연장을 나오는 순간, 로비에 준비되어 있던 노오란 해바라기 꽃을 손에 쥐게 되자 라만차의 기사 중 한 명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설렘이 가득해질 수 밖에 없었다. 센스있는 하나카드 컬쳐의 꽃선물은 감동이었고, 행복하라고 쓰여진 문장과 같이 그날은 내내 해피 모드였다.
우리는 모두 라만차의 기사라고 말하던 세르반테스의 울림있는 목소리와 배우들이 함께 부르는 '더 임파서블 드림'이 메아리가 되어 귓가를 울렸던 하루였다. 공연의 모든 장면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이날 본 공연은 정말 최고였기에 폭풍 눈물을 흘리며 빠져들었음에 후회는 없다.
덧붙여 이날 최애 페어를 만나게 되었으나 요 조합으로는 남아 있는 날이 딱 하루 뿐이었던지라 하나카드 컬쳐 뮤즈 투나잇을 마지막으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와는 안녕을 고하게 됐다. 어쩌면 그래서 더 짙은 여운을 간직하게 된 걸지도.
언제는 뭐, 맨날 이루어져서 꿈을 꿨나 싶다. 꿈꾸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예전과 달라지므로,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걸. 그래서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현명한 사람보다는 미친 사람 되는 게 조금 더 쉬울지도 몰라. 현실에 안주할 생각이 없는 걸 보면, 이미 돈키호테의 길에 합류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런지.
이룰 수 없는 꿈이기에 별을 향해 손을 뻗는다. 가끔은 무모해지련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라만차 지방에도 발을 들여놓고 싶다. 황량함으로 표현되던 그곳에 가서 라만차의 기사를 소망함으로써 꿈을 실현시켰던 슬픈 수염의 기사, 돈키호테의 발자취를 떠올려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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