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창작오페라 레드슈즈 :: 빨간구두를 향한 욕망이 선사한 잔혹동화
국립오페라단의 창작오페라 <레드슈즈>가 무관중 영상공연으로 전환됨에 따라 방구석 1열에서 관람할 기회가 생겼고, 이로 인해 주말 오후가 더 즐거워졌다. 연극과 뮤지컬에 비해 오페라는 다소 생소한 장르와 다름없어 걱정이 앞섰는데, 생각보다 흥미진진하게 시청하는 일이 가능해 의미가 있었다.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구두>는 어느 날 빨간 구두를 얻게 된 소녀가 신을 신고 멈출 수 없는 춤을 추다가 다리를 잘라내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반면, 이를 원작으로 재탄생된 창작오페라 <레드슈즈>는 20년 전에 마을에서 쫓겨난 마담슈즈가 다시 돌아와 자신을 버린 목사에게 복수를 결심, 그의 딸 카렌에게 접근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펼쳐지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지휘 : 김주현
연출 : 표현진
작곡 및 대본 : 전예은
공동대본 : 김연미
무대 : 김현정
의상 : 정민선
[CAST]
카렌 : 이윤경
마담슈즈 : 백재은
목사 : 윤병길
청년 : 나건용
어린 마담슈즈 : 조한나
어린 목사 : 김승직
오직 권위의 상징인 교회만이 한가운데 우뚝 자리잡은 무채색의 도시에서 존경받는 목사의 딸로 그곳을 떠난 적 없이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카렌은 답답한 일상을 버거워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내던 중, 마담슈즈와 함께 나타난 빨간 구두의 유혹에 사로잡힌다.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색깔을 지니지 못한 장소에서 그저 정숙한 여인이 될 것을 강요받은 카렌에게 눈부신 빛을 발산하는 빨간 구두는 지금껏 감춰둔 욕망을 꺼내들게 만드는 매개체와 다름 없었다. 그리하여 카렌이 자유를 향한 갈망을 표출하며 서서히 빨간 구두를 향해 손을 내밀 때쯤, 어린 마담 슈즈와 목사의 과거가 드러나며 관객들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일깨워주고야 말았다.
창작오페라 <레드슈즈>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빨간 구두는 사랑과 배신이 난무하는 끝없는 욕망의 결정체로 시선을 압도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단 하나의 선물이, 복수의 산물이 되어 모두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과정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색채 없는 도시를 위해 제작된 무대 연출이 감탄을 자아냈고, 오직 마담슈즈의 부띠끄만이 화려하게 빛남으로 인하여 마주하게 된 대비 효과도 탁월했다. 그 속에서 빨간 구두만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와 함께 무채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colorless"를 소리높여 외치며 개성이 존재하지 않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은 공포와 아이러니함을 동시에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들에게 허용되는 건 종교적 색채가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세계에서 카렌의 존재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리하여 삭막함으로 가득 채워진 도시에 갇힌 카렌이 레드슈즈를 선택한 건, 숨막히는 곳으로의 탈출을 도와 자유를 꿈꾸게 만드는 도구였기 때문일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했다.
이를 위한 결정에 앞서 카렌이 빨간구두를 품에 안고 청년의 집에서 고민을 털어놓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무대 오른쪽에서 진행되는 동안, 무대 왼쪽으로 어린 시절의 마담슈즈와 목사의 과거 또한 만나보게 연출된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맞닥뜨린 마담슈즈와 목사의 사랑에 대한 진상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표현돼서 이 점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마담슈즈가 간직해 온 레드슈즈에는 20년 전, 마을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당함으로써 흘려야 했던 선명하고도 붉은 피가 스며들어 있었음을 알려주는 장면이야말로 잔혹하기 그지 없었다. 관람 연령 등급안내에 쓰여진 설명과 같이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 할 말을 잃었다.
덧붙여 공연의 결말도 조금 모호한 감이 없지 않았다. 관객들이 원하는 방향에 따라 마무리를 지으면 될 듯 한데, 그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하는 창작오페라 <레드슈즈>의 엔딩은 이거였다. 카렌이 빨간구두 덕분에 죽음을 통한 자유를 얻었다는 것. 빨간구두와 관련된 진상을 알아차리고 나서도 욕망을 멈추지 않았고, 두렵지만 자유를 원하는 마음이 더 컸으므로 꿈꾸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으리라 믿었다.
배우들의 연기 못지 않게 힘있는 열창 또한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그중에서도 작품의 중심인물로 열쇠를 쥐고 있던 카렌 역의 이윤경, 마담슈즈 역의 백재은, 어린 마담슈즈 역의 조한나를 눈여겨 보게 되었다. 특히, 웃음소리마저 남달랐던 백재은의 카리스마는 아직도 머리 속에 선명하다.
어린 마담슈즈가 빨간구두를 신고 춤을 출 때 입었던 드레스를 카렌이 착용하고 무대를 종횡무진하던 장면도 짙은 여운을 남겼다. 겉감은 밝은 초록색이었는데, 춤을 추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짙은 빨강으로 이루어진 안감이 보여지는 게 감명깊었다. 대화창에서 이 의상을 수박바에 빗댄 관객의 한 마디에 빵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공연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구성이 동일한 점도 매력적이었다. 빨간구두를 품에 안고 사라지던 남자 아이와 빨간구두를 향해 이끌리듯 다가가던 성인 여성을 통해 욕망의 짙은 색채에 빠져드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만나게 돼 인상깊었다.
이 세상에 욕망이 없는 인간은 없다, 그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카렌이 빨간구두를 욕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도 이와 같다. 무채색의 도시에서 자신의 색깔을 숨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그들의 욕망에 충실한 것이라고 보면 아귀가 들어맞는다. 어른들을 위한 욕망의 잔혹동화다운 이야기였다.
코로나 때문에 오케스트라를 대신해 방타 타악기 앙상블이 연주를 맡았다고 하는데 그로 인하여 극에 걸맞는, 소름 돋는 음악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어 신선했다. 부띠끄에서 새빨간 드레스를 입은 무용수들이 카렌의 곁을 맴돌며 빨간구두와 더불어 욕망을 내보이는 순간도 명장면으로 남았다.
게다가 국립오페라단의 창작오페라 <레드슈즈>가 우리말로 부르는 오페라였다는 점에서, 보다 쉽게 오페라 장르로의 접근을 도와서 이 또한 마음에 들었다. 이러다 오페라에도 입문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일단은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공연장에서 현장감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현저히 줄었지만, 오히려 지금껏 접하지 못한 장르를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생중계의 장점을 깨닫게 돼 뜻깊은 시간이었다. 이날 무관중 영상공연을 위해 최고의 무대를 선사한 국립오페라단 창작오페라 <레드슈즈> 제작진과 출연진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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