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렌트 :: 오직 오늘이 전부인 청춘들의 삶이 전하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

한국에서 2000년에 초연이 이루어진 뮤지컬 <렌트>가 2020년 올해로 공연 20주년을 맞이함에 따라 무려 9년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현대화함으로써 탄생된 록 뮤지컬임과 동시에 작품의 대본, 작곡, 작사를 맡았던 조나단 라슨의 자전적 이야기까지 만나보는 것이 가능해서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공연이었다. 참고로, 미국 브로드웨이 초연은 1996년이라고 한다.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인터미션 20분을 포함해 총 160분의 러닝타임으로 진행된 뮤지컬 <렌트>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모여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초점이 맞춰짐에 따라 이들의 삶이 전하는 꿈과 사랑, 희망을 확인하게 해주며 감동과 위로를 건넸다. 



월세를 낼 돈이 없어 쫓겨날 위기에 놓인 청춘들이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예술을 향한 꿈으로 나아가며 사랑하고, 힘든 상황에서 위로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뮤지션 로저, 클럽 댄서 미미, 다큐멘터리 제작자 마크, 컴퓨터 천재 대학 강사 콜린, 거리의 드러머 엔젤, 자유분방한 행위예술가 모린, 공익변호사 조앤, 집세를 밀린 친구들이 거주하는 건물 주인 베니가 만들어내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흥미로움을 선사했다. 


뿐만 아니라 에이즈, 동성애, 마약 등의 사회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점도 파격을 경험하게 해주었음은 물론이다.  


이와 함께 뮤지컬 <렌트>는 로저, 미미, 마크, 콜린, 엔젤, 모린, 조앤, 베니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캐릭터 각각의 사연을 포함해 이들을 연결시켜주는 유기적인 스토리 전개가 재미를 더했다. 대신에 이로 인해 따라오는 산만함은 단점으로 작용했음을 인정하는 바다.



그럼에도, 대체적으로 정신없는 사건사고가 만연한 와중에도 뮤지컬 <렌트>에 깊이 빠져들게 된 건 음악 때문이었다. 송스루 형식으로 흘러가는 공연의 특성상 대사가 아닌 노래로 감정을 전달하는 일이 많았는데,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귀를 즐겁게 해줘서 행복했다. 록, R&B, 발라드, 탱고, 가스펠 등등. 공연 관람 후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무의식적으로 입에 멜로디와 가사가 맴도는 걸 깨닫고 중독성이 대단하다 여겼다. 


무대 양쪽으로 설치된 2층 철골구조물이 가난한 예술가들의 현재를 대변하는 느낌이 들었고, 왼쪽 아래에 자리잡은 라이브 밴드의 모습도 공연 시작 전부터 눈에 쏙 들어와서 호기심을 자아냈다. 오른쪽 상단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크리스마스 트리 곳곳에 장식된 조명들에 불이 들어옴으로 인해 반짝거리던 장면도 예뻤다.


다만 엔젤의 엔딩에 다다라 맞닥뜨리게 된 넘버와 캐릭터들의 움직임은 기괴해서 불호였고, 갑작스레 기적을 전하던 미미의 부활 엔딩 또한 부자연스러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됐다. 미미가 깨어나 얘기하는 장면에서 모린의 공연과 연관되는 대사를 통해 개연성을 부여하는데 힘을 쏟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마크가 만든 영화 영상도 부실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가지 정황상 로저, 미미 커플이 메인 주인공에 가까웠으나 이들의 서사보다 오히려 콜린, 엔젤 커플과 모린, 조앤 커플에게 더 관심이 갔던 것도 고개를 내젓게 했다. 주인공 커플이지만 매력이 없어서 배우들의 열연만으로 채우지 못하는 갈증이 남았다.   



[CAST]

로저 : 장지후 / 미미 : 아이비 / 마크 : 정원영

콜린 : 유효진 / 엔젤 : 김지휘

모린 : 민경아 / 조앤 : 정다희 / 베니 : 임정모 

*앙상블*

고든 / 베니 커버 : 신현묵

Mrs.코헨 / 조앤 커버 : 배수정

스티브 : 이태영 / 알렉시 : 김유정

스윙 : 이정혁 / 스윙 : 김송이

Mrs.제퍼슨 : 김채은 / Mr.제퍼슨 : 서종원

폴 : 이병현 


과거의 아픔으로 인해 미미에 대한 감정을 부정하며 반항기 가득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지후 로저는 넘버 소화에 강점이 있었다. 격렬한 안무와 노래로 점철된 'Out Tonight'에서 거침없는 댄서로의 위엄을 과시했던 아이비 미미의 노련함도 도드라졌으며,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릴 때 튀어나오던 반짝이가 자체 조명의 역할을 하면서 눈부심이 더해졌다. 의외로 넘버가 아닌 연기가 더 좋았고, 안타까운 찰나에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감명깊었다.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해설자 역할을 겸한 원영 마크는 남다른 몸놀림과 탁월한 열연으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고, 효진 콜린은 'Santa Fe'로 감미로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도왔다. 드랙퀸으로 변신한 지휘 엔젤의 비주얼에는 입을 다물 길이 없었으며, 'Today 4 U'에서 확인시켜 준 자신만만함도 좋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그야말로 꿀이 뚝뚝 떨어지던 효진 콜린과 지휘 엔젤의 'I'll Cover You'도 사랑스러웠고,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미소 지으며 입을 맞추던 장면은 따뜻한 다정함이 담뿍 묻어나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본인의 마지막 곡에서 있는 힘껏 포효하던 지휘 엔젤의 고음도 기대 이상이었다. 



경아 모린은 1막의 클라이막스라고 볼 수 있는 건물 철거 반대 시위 공연을 펼치는 인물로, 기똥찬 행위예술을 통해 남다른 존재감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객석의 관객들과 무대 위의 배우들을 압도하는 충격적인 카리스마가 빵 터지는 웃음과 뭐든지 시키는대로 따라하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통솔력으로 발현되며 놀라운 호응과 밀도 넘치는 몰입감을 확인하게 했다. 'Over The Moom' 역시도 명불허전이었다. "우린 저 달을 뛰어넘어야만 해"라는 가사의 의미심장함도 공연 속에서 빛을 발했다. 크리스마스 트리 위로 두둥실, 밝게 떠 있던 보름달.  


다희 조앤은 양성애자 모린을 여자친구로 두었다는 이유로 불안감을 안은 채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일적으로는 프로페셔널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감정적일 수 밖에 없는 캐릭터로써 모린의 전남친인 마크를 경계하면서도 진심을 토해낸 뒤, 탱고를 추며 함께 부르던 'Tang : Maureen(탱고 모린)'이 눈과 귀를 집중하게 했다. 경아 모린과 다희 조앤의 말다툼이 겉잡을 수 없는 싸움으로 불거짐으로 인하여 열창으로 이어진 'Take Me Or Leave Me'도 현실감 넘쳤다. 등장할 때마다 다희 조앤이 완성시킨 캐릭터의 매력이 두드러졌고, 시원한 가창력도 최고였다. 


정모 베니는 친구들과 달리 결혼 후에 부유한 삶을 살고 있으나 그로 인해 과거를 그리워함으로써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신현묵, 배수정, 이태영, 김유정, 이정혁, 김송이, 김채은, 서종원, 이병현으로 구성된 앙상블 배우들이 배역을 맡아 종횡무진하는 모습도 눈부셨다. 뮤지컬 앙상블 오디션 프로그램 <더블 캐스팅>에서 만났던 서종원 배우를 방송 종영 후 뮤지컬 <렌트>로 오랜만에 보게 돼 반가웠다. 떼창을 뚫고 나오던 김채은 배우의 목소리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그리하여 커튼콜에서 웅장함을 더한 'Seasons Of Love'에서의 김채은, 서종원 배우의 활약에도 박수를 무한히 보내게 되었음을 밝힌다. 


▲ 뮤지컬 <렌트> 커튼콜


자유로운 보헤미안을 노래하는 'La Vie Boheme(라비보엠)'에서 터져 나오던 예술가 친구들의 열정도 놀라웠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며 공연장을 흐르던 'Seasons Of Love'에는 박수 갈채가 함께 했던 것도 흥미로웠다. 


이날 2층 왼쪽 좌석에서 공연을 봤는데, 시야에 가리는 부분이 없어서 흡족했다. 음향도 괜찮았고 다 좋았으나 생각보다 실내온도는 좀 더웠다. 날씨가 더워져도 공연장에 갈 땐 항상 긴팔 겉옷을 챙기는 편이라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커튼콜 촬영이 가능한 공연이 뮤지컬 <렌트>지만 오츠카와 안경에 마스크까지, 준비물이 많아서 카메라는 안 갖고 갔다. 스마트폰 촬영은 아무래도 아쉬움이 많이 남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몸이 편한 게 제일이니까 이 정도로 만족한다. 커튼콜 말미에 성사된 마크와 엔젤의 포옹도 훈훈했다. 



넘버 중에서 가장 마음을 울렸던 곡은 'Seasons Of Love'로, 공연을 넘어서 우리 삶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담긴 가사와 온기로 가득한 멜로디가 감동의 점정을 찍는 노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1년의 시간을 "525,600분의 귀한 시간들"로 표현하며 인생의 가치를 사랑으로 얘기하는 노랫말에는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한 곡 더, 'Another Day'의 울림도 상당했다. 넘버 속에서 울려퍼지던 "내일은 없어, 오직 오늘 뿐(No Day, But Today)"이라는 가사가 마음에 깊이 남아 용기를 주었다. 


▲뮤지컬 <렌트> 커튼콜


공연을 보기에 앞서 동명의 영화를 예습 차원에서 보고 갔더니 이 또한 큰 도움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첫 관람을 앞둔 관객이 있다면, 보다 빠른 이해를 위해 영화를 먼저 시청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스토리와 음악에 한층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 


한국 공연 20주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만나게 된 뮤지컬 <렌트>는 1990년대가 배경이라서 다소 낡은 극이 될 수 밖에 없긴 했지만, 그거야말로 당연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와 지금이 같아서야 그게 더 이상한 거니까. 한 마디로, 볼만한 가치가 있는 공연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오직 오늘이 전부인 청춘들의 삶이 전하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는,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산만하고 정신없음의 결정체를 선보인 뮤지컬 <렌트>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장점과 단점을 넘어 하나의 매력으로 다가왔던 공연이었다. 그저 청춘이라는 단어로만 정의될 수 없는 삶의 순간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에너지가 여운을 남겨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밌게 잘 봤다. 다른 캐스트를 향한 궁금증마저 증폭된, 성공적인 첫 관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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