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호스, 일상의 서스펜스로 가득 채워진 고딕 스릴러
강화길의 단편집 <화이트 호스>는 일상의 서스펜스로 가득 채워진 고딕 스릴러의 묘미를 경험하게 해준 책이었다.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건을 통해 맞닥뜨리게 되는 긴장감이 공포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들며 책장을 넘기게 도왔던 순간들이 압권이었다.
매해 여름이면 마주하게 되는 납량특집보다 더 소름이 돋을 수 밖에 없었던 건 현실의 불안을 고스란히 닮은 이야기에 뒤따르는, 어딘가 조금 미묘한 감정의 여운이 오래도록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며느리가 시댁의 제사를 통해 감추어진 비밀을 깨닫게 되는 '음복',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서로 다른 애정이 손녀에게 끼친 영향을 확인하게 해준 '가원', 화자가 해외근무 중인 남편 대신 시어머니와 함께 살며 딸을 키우는 동안 벌어진 기묘한 일을 다룬 '손', 여성들의 연쇄 실종이 발생한 동네에 존재하는 집으로 향하고자 귀갓길에 여성 택시운전사의 차를 탄 여성이 겪는 혼란스러움과 아이러니를 동시에 보여준 '서우', 소설가 지망생이자 연예인이었던 김미진의 죽음을 파헤치는 과정 속에서 진실로 나아가려 애쓰던 '오물자의 출현',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 제목을 가져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작가의 굳은 다짐을 전한 '화이트 호스', 뱀파이어와 인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애달프게 그려낸 '카밀라', 이렇게 각기 다른 개성이 넘치는 7편의 단편소설이 책 속에서 어우러지며 작가만의 남다른 스타일을 맞닥뜨리게 해줘 흥미로웠다.
그중에서도 '음복', '가원', '화이트 호스'가 인상적으로 읽혔다. '음복'은 2020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으로 먼저 만나고 <화이트 호스> 단편집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접하게 됐는데, 읽을수록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이야기의 무게가 깊이 와닿아서 놀라웠다. 세나는 가부장제에 짙게 깔린 무지의 권력을 남편 정우에게서 포착했지만, 이날의 제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임을 일깨우는 시어머니의 제안으로 이와 관련된 일에 대해 침묵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여성들만의 원치 않는 불편한 유대감이 형성된 찰나가 돋보였고, 뒤틀린 스릴러의 면모를 자아내는 점이 감탄을 터뜨렸다.
'가원'은 외부인이었던 세나가 결혼으로 가족의 일원이 된 것과 달리, 태어날 때부터 내부인으로 자리잡은 연정이 갑자기 사라진 할머니를 찾아 폐허가 된 옛집인 가원으로 향하면서 지난 기억을 내보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손녀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선사한 할아버지와 성장하는 내내 혹독한 양육을 담당한 할머니의 진심을 알게 되었음에도, 두 사람을 향한 감정의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이 작가인 화자가 슬럼프를 겪는 동안 경험한 사건과 다채로운 감정의 물결이 녹아든 '화이트 호스'는, 앞으로 계속될 강화길 작가의 작품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 같아 문득 궁금해졌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 또한 들어보고 싶어졌음은 물론이다.
고딕 스릴러다운 분위기가 섬뜩함을 제대로 자아냈던 '손'과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주인공 덕택에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여성인 이야기의 서스펜스가 두드러졌던 '서우'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전라도 말로 인형을 의미하는 오물자를 제목으로 사용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오물자의 출현'과 애절한 판타지가 스며든 '카밀라' 역시도 기억에 남았다.
단지 소설에만 존재할 법한 이야기가 아닌 섬뜩한 현실을 바탕으로 여러 장르를 결합해 구현된 에피소드의 이색적인 분위기가 의외의 공감을 이끌어냈고, 그로 인해서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차라리 이해할 수 없었을 감정의 소용돌이가 온몸에 퍼져나가며 스산함을 전해줘서 충격적이었다.
모든 일을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여성들의 일상 서스펜스, 그 안에서 느껴지는 긴박감이 작가만의 고딕 스릴러 장르로 오롯이 표현돼서 엄지를 척 치켜들게 됐다. 혐오와 폭력의 이름 아래에서 인물들이 겪어야 했던 부조리함이 존재감을 드러내자 그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닐 수 없었다.
덧붙여 <화이트 호스>가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라고 하던데, 이 책 덕택에 미처 읽지 못한 첫 번째 소설집도 꼭 만나고 싶어졌다. 삶에 맞닿아 있는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함으로써 독특해서 매력적인, 자신만의 글을 써내려갈 줄 아는 능력이 대단해 보였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주옥같았던 작가의 말 또한 감명깊었다. 특히 이제 다시는 작가의 말을 길게 쓰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며 언제나 그렇듯, 내게는 소설로 충분하다는 한 문장으로 끝을 맺은 엔딩도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지막으로, 문학동네 블로그 속 이번 책을 어떤 책으로 만들고 싶냐는 작가의 질문에 대한 편집자의 답도 되새겨 볼만 했다. 앞으로 여성 스릴러의 고전이 될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당당히 밝혔는데, 직접 읽어보니 꿈이 현실로 눈 앞에 성큼 다가왔다는 확신이 들어서 든든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는 <화이트 호스>가 숨 막히는 서스펜스로 다져진 대한민국 여성 고딕 스릴러의 고전으로써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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