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의 맛, 열여섯 네 친구의 약속과 저마다의 계획으로부터 비롯된 미스터리 성장담

열여섯 청춘의 시간은 불안정과 혼란으로 가득 채워진,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터널을 걸어가듯 매우 느리게만 흘러간다. 그리하여 누구나 겪게 되는 10대 학창시절의 다채로운 감정 속에서도 유독 방황이란 두 글자가 사무치게 마음을 파고들어 견디기 힘들 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럴 땐 잠시 멈춰 서서 쉬어도 좋다. 원하는 답을 찾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일 뿐이니까.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내면의 성장통과 함께 나이를 먹으며 쑥쑥 자라난다.  


조남주가 선보인 장편소설 <귤의 맛>은 이러한 시기를 보내는 네 친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졌다. 영화 동아리에서 만나 친해지게 된 소란, 다윤, 해인, 은지는 3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에 떠난 제주도 여행에서 넷이 다함께 신영진고에 지원하기로 약속하고 타임캡슐을 만들어 땅에 묻는다. 각자의 계산과 계획이 담긴,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소설의 시작과 끝은 고등학교 입학식 당일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그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다윤, 소란, 해인, 은지, 네 사람이 각각의 챕터별로 주인공을 맡아 속사정을 들려줌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하게 도왔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여중생들의 일상은 생각보다 순탄치 않고 버거웠으며,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현재와 주변을 둘러싼 세계의 영향으로 인해 갈등과 충돌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네 친구들은 계속해서 자신만의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애쓰고 있었으니, 그 모습에 있는 힘껏 응원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윤은 아픈 동생을 간호하는데 모든 신경이 집중된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학교에서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외로운 아이였다. 이와 함께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외고 진학을 준비하는 우등생이기도 했다. 


소란은 넷 중에서 가장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는 아이로 존재감이 없는 편이지만,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성격을 지녔다. 다만, 친구들과 관계를 이어나가는 일 자체가 어려워서 이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어린이집에 같이 다니던 단짝친구와의 허무한 헤어짐도 마음 한켠에 상처로 자리잡았다. 


해인은 아빠의 사업 실패에 따라 지금까지 살던 넓은 아파트에서 좁은 집으로 이사한다. 그 와중에 자사고인 가람여고에 딸을 진학시키려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아빠의 고집 때문에 해인은 큰이모네 집으로 위장전입을 하기에 이른다. 


은지는 엄마, 할머니와 함께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가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친구들의 무리에서 잘려 나간 아픈 경험을 간직한 아이다. 게다가 자카르타 주재원에 지원한 엄마로 인해 넷의 약속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게 된다. 


미묘하게 어긋나는 관계와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네 친구의 삶이 아주 어릴 때부터 열여섯을 지나 열일곱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섬세한 문체와 남다른 묘사력으로 쓰여져 읽는 내내 잊고 지냈던 과거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던 책이 바로 <귤의 맛>이었다.


뿐만 아니라 앞부분은 넷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에피소드를 배치해 성장소설다운 분위기를 자아낸 반면, 뒷부분은 일찌감치 설정해 둔 미스터리에 대한 궁금증을 속시원히 해소시켜주는 이야기로 구성돼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특히, 다윤의 외고 면접 날 날아온 엄마의 문자와 해인의 위장전입을 신고한 한 통의 전화가 선사하는 짜릿한 스릴은 기대 이상이었다. 



결론적으로, 조남주의 <귤의 맛>은 열여섯 네 친구의 약속과 저마다의 계획으로부터 비롯된 미스터리 성장담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태껏 읽어 왔던 작가의 소설과는 결도, 장르도 다르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람들을 꿰뚫는 통찰력이 문장 안에서 고스란히 드러나 읽는 재미가 상당했다.


그리고 제주도의 감귤 체험장에서 이곳 귤과 마트 귤의 차이점을 상세히 알려주던 은지와 그 얘기를 곱씹어 보며 자신과 친구들이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를 생각해 보는 소란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초록색일 때 따서 유통 과정 중에 혼자 익어버린 마트의 귤과 나무와 햇볕에서 끝까지 영양분을 받은 그곳의 귤은 확실히, 맛이 다를 터였다.


책을 읽어 나가는 동안 아직은 초록의 귤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소란, 다윤, 해인, 은지를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나에게도 그러한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하며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을 돌아보게 돼 기분이 묘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저 세월이 흘러 문득 돌이켜 보니 눈부시게 빛나는 날들이었음을 알게 된 것만으로 충분하다. 


상큼해도 맛있고, 달아도 맛있는, 귤. 새콤달콤한 귤이 익어가는 나날들 속에서 이들을 닮은 네 친구의 우정 또한 더욱 깊어져 가기를, 이로 인해 그들 역시도 멋지게 성장해 나가기를 소망해 본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쓰는 이야기들이 딸로부터 시작되거나 딸에게서 완성된다는 작가의 말까지 모든 게 좋았던 책이 <귤의 맛>이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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