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 러브, 좀비 :: 서늘함 속에 사랑이 깃든, 기묘한 호러 판타지
조예은의 <칵테일, 러브, 좀비>는 각양각색의 4가지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었던 단편소설집으로 서늘함 속에 사랑이 깃든, 기묘한 호러 판타지의 매력이 돋보였다. 한 편씩 읽어나갈 때마다 장르적으로 미세한 차이가 느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단어들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존재해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초대', '습지의 사랑', '칵테일, 러브, 좀비',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를 순서대로 섭렵해 나가는 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재미와 참신한 상상력의 발현을 경험하게 돼 기뻤다. 여기에 일말의 잔혹동화적인 면모까지 가미됨에 따라 예상을 뛰어넘는 신선한 자극이 놀라움을 일깨워준 책이기도 했다.
첫 번째로 마주하게 된 단편 '초대'는 어린 시절,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회를 먹은 날로부터 17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목에 걸린 가시와 함께 살아가며 시시때때로 통증을 느끼는 채원의 이야기를 담았다.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남자친구 정현과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목구멍의 따끔꺼림이 점점 더 심해져만 가던 어느 날, 흐릿한 인상을 지닌 여인 태주에게 이끌려 낯선 공간으로의 초대에 응하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연인 사이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고통받아왔던 채원이 태주를 통해 핏빛 세계로 안내되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사건의 내막은, 목에 박힌 가시가 시원하게 빠져나오는 순간과 같은 짜릿한 쾌감을 선사했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는 미묘하지만 분명한 폭력을 참고 버텨 온 여성 빌런의 탄생을 그린 작품이라는 설명이 안성맞춤이었다. 장르로 따지자면 현실과 환상이 적절히 섞여 완성된, 피에 물든 잔혹한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습지의 사랑'은 물귀신과 숲귀신의 애틋한 사랑을 확인하게 해준 이야기였다. 물을 떠날 수 없는 물귀신과 숲을 벗어나지 못하는 숲귀신이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천천히 마음을 열어가는 동안,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그들이 머무르는 공간을 침범당하게 됨으로써 맞닥뜨려야만 했던 엔딩이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어색한 인사로 시작된 만남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정도로 가까워지며 절절한 서사를 엿보게 만든 귀신들의 사랑이 아름다웠다. 이로 인하여 풋풋한 호러 로맨스와 무분별한 개발의 폐해가 불러 일으킨 비극의 어우러짐이 인상적이었던 단편이었다.
'칵테일, 러브, 좀비'는 좀비물과 가족 드라마 사이의 경계에 자리잡은 단편이었다. 국밥집에서 뱀술을 마시고 좀비가 된 채로 집에 돌아온 아빠를 엄마와 함께 관찰하며 지난 날의 추억 속에 녹아든 오묘한 감정을 떠올림과 동시에 이별을 준비하는 주연의 시선에서 쓰여진 얘기였다.
시간이 갈수록 이성을 잃고 좀비가 되어가는 아빠를 통해 가족 간의 사랑을 대변하는 애증을 되새기며, 정부의 조치 방안이 신속히 마련되길 기다리면서 무사히 살아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연과 엄마의 시간이 중심을 이루었다. 한 가족의 생사를 뛰어넘어 나라의 안녕을 결정짓게 될 좀비 바이러스 퇴치 작전 속에서 적당한 유머코드와 긴박감이 느껴지는 드라마적 스토리 전개가 돋보여 감명깊었다. 이러한 이유로 좀비물보단 가족 드라마로 불리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소설이었음을 인정한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주어진 기회 안에서 원하는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바꿔 나가려 애썼던 이들이, 오히려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아이러니를 접하며 좌절을 맛보게 되는 타임 패러독스물로써 촘촘한 짜임새와 기막힌 반전이 감탄을 자아냈다.
제2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소설로 악마에게 농락당한 인간의 처절한 비명과 절규가 결말을 통해 전해져 와서 안타까웠던 반면, 몰입감이 대단했던 이야기의 흐름으로 말미암아 예상치 못한 전율을 느끼게 하며 남다른 재미를 전해주는 단편이었음을 밝힌다.
그리하여 네 가지 단편 모두 놓칠 수 없었던 책이 바로 <칵테일, 러브, 좀비>였다. 작가의 남다른 세계관이 녹아든 이야기들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게 만들 뿐만 아니라 궁금증까지 유발하는 흡입력으로 시선을 사로잡아서 재밌게 잘 읽은 장르소설 단편집 중 한 권으로 남았다.
기묘한 호러 판타지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에 사랑이 듬뿍 담겨 있어 몰입하며 읽어 내려간 책의 묘미는, 특히 무더운 여름날에 만나면 시너지가 폭발할 테니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칵테일, 러브, 좀비>와 함께 하기에 적절한 때라고 확신한다. 물론 언제 읽어도 좋은 도서인 건 맞다. 그래도 이왕이면 시원한 바람이 필요한 찰나에 책을 펼쳐보기를. 분명히, 기대 이상의 즐거움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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