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엘리펀트 송 :: 결핍이 초래한 코끼리의 구슬픈 노래

연극 <엘리펀트 송>은 공연을 볼수록 와닿는 부분이 더 많은 작품이었다. 그리하여, 잔잔함 속에 무심코 스며든 처연한 긴장감과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심리적 압도감이 더해짐에 따라 경이로운 3인극의 묘미를 확인하게끔 도왔다. 


엘송은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막이 오르며 올해로 벌써 사연째를 맞이했는데, 재연을 제외하고는 매번 만나왔던 공연이라 그런지 몰라도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병원장 그린버그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하루 앞두고 종적을 감춰버린 의사 로렌스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그가 마지막으로 만난 환자 마이클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하지만 마이클은 수간호사 피터슨을 경계하며 코끼리 얘기만 늘어놓기 바쁘다. 그러다 피터슨이 방을 나가고 두 사람만 온전히 남게 되자 마이클은 로렌스를 빌미로 그린버그와 묘한 심리전을 펼쳐나간다.



결핍으로 가득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소년의 자유를 향한 애타는 갈망을 표현해낸 공연이 연극 <엘리펀트 송>이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라난 아이의 슬픔이 이야기 곳곳에 묻어나 보는 내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내용을 이미 알고 관람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함 없이, 이어질 이야기를 훨씬 더 흥미롭게 지켜보는 일이 가능했다. 공연 초반부터 마이클의 영악함이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대사에 담긴 의미 또한 절절하게 파고들었으므로, 깊이 몰입해서 세 사람의 시간을 바라보게 됐다. 


이로 인하여 결말을 마주한 순간에는 결국,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CAST]

마이클 : 정일우

그린버그 : 고영빈

피터슨 : 고수희

안소니 


정일우 배우의 마이클은 소년미가 아닌 애어른의 면모가 돋보이는 캐릭터로 안쓰러움을 더했다. 상처를 안고 살아 온 아이의 고독한 인생이 눈에 선하게 그려질 정도였다. 그래도 웃을 땐 천진난만함이 도드라져 인상적이었고, 코끼리 얘기를 털어놓을 때 만나볼 수 있었던 폭발적인 연기력도 좋았다. 순간적으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쏟아내던 감정의 표출, 그로 인하여 흘러내리던 눈물과 절규 역시도 감탄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다만, 딕션은 좀 아쉬웠다. 발음이 부정확해서 대사가 뭉개지는 찰나가 없지 않았다. 이 점만 보완해 준다면 괜찮겠다 싶었다.


그린버그에게 부탁해서 엄마가 부른 오페라 앨범을 감상하며 안소니를 움직여 입모양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디테일을 선보였던 장면에서도 눈길이 갔다. 마이클과 안소니 모두에게. 


고영빈 배우의 그린버그는 마이클에 비해 나이는 많지만, 티없이 자라난 어른의 이미지가 물씬 풍겼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마이클이었으나 마이클이 그린버그가 리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분위기가 형성됨에 따라 의기양양한 자신감이 전해져 올 때도 재밌었다. 첫인상은 냉철해 보였으나 사건의 실마리가 조금씩 풀려나감에 따라 자상함이 드러나 미소가 지어졌다. 


고수희 배우의 피터슨은 마이클에 대한 애정이 강한 캐릭터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마이클이 해주는 얘기에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고, 마이클의 선택을 뒤늦게 접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해 처절한 울음을 토해내는 장면에선 나까지 따라 울게 됐다. 마이클이 다정다감한 피터슨과 거리를 두려고 애썼던 건, 자유를 원하는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까봐 두려워서였을 거다.



부모의 애정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의 결핍은 다른 사람을 통한 사랑으로 쉽게 채워질 수 없는 것이었고, 이러한 이유로 자유를 택하게 된 마이클의 영리함은 구슬픈 코끼리의 노래와 함께 무대에 남아 서글픈 여운을 전했다.


이 공연은, 연극 <엘리펀트 송>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벌이는 심리게임에 중점을 둔 작품이 아니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오히려 마음 둘 곳을 잃어버린 아이의 마지막 고백이 전하는 진심에 무게가 실려 있음을 알게 되니 절로 책임감이 생겼다. 


덧붙여 마이클, 그린버그, 피터슨 못지 않게 무대 위에서 열연해준 우리 안소니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엘송 사연에 캐스팅된 3명의 배우에 따라 안소니 발바닥의 문양이 각기 다른데, 정일우 마이클의 안소니 발바닥에는 왕관 쓴 개구리가 부착되어 있다. 이날 좌석이 객석 입구에서 머지 않은 맨뒷자리였기에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그 와중에 초록색 만큼은 꽤나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로비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트리와 안소니가 공연 전부터 반갑게 맞이해 설렜던 엘송과의 한때였다. 아마도 재관람은 안 할테지만 다음에 또 무대에 올라온다면 그때는 다시 공연장을 찾아와 엘송을 보게 되지 않을까, 그런 예감이 들었다.


엘송의 명대사가 사무치게 마음을 울렸던 시간을 잊을 순 없을 테니까.


"안소니가 사랑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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