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경종수정실록 ::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날의 이야기를 풀어낸 공연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초연이 현재 대학로 티오엠 1관에서 공연 중이다. 이 작품은 조선의 20대 왕인 경종을 중심으로, 독살과 관련된 이야기를 재해석해 풀어내며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도록 만들었다.
경종이 기면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노출됨에 따라 왕권은 점점 더 위태로워져만 갔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위를 노리는 이복동생 연잉군과의 대립마저 발생하자 시대의 혼란스러움은 극으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이 순간 벌어지는 일 전부를 손에 쥔 붓으로 써내려가는 홍수찬이 있었다.
경종의 악몽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의 시작은, 공연의 막이 오를 때부터 비극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가득했다. 세자로 30년 가까이를 살아오다 4년이라는 짧디 짧은 기간 동안 왕의 자리에 오른 인물의 불행한 삶이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으로 말미암아 극대화되는 느낌이 들어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숙종과 장희빈으로 알려진 희빈 장씨의 아들로 태어난 경종(이윤)이 왕위에 머무르며 경험했던 인생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줌과 동시에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이금)과의 관계 및 노론과 소론이 벌였던 당쟁의 치열한 싸움까지 마주할 수 있게 도왔던 공연은, 조선왕조의 역사를 향한 관심까지 불러 일으키는 뜻깊은 작품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작품 치고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부분이 마땅치 않아서 아쉬웠다. 스토리가 전개되는 동안 맞닥뜨려야 했던 루즈함은 때때로 졸음을 쏟아지게 만들어서 슬프게도 몽롱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사실과 허구 중에서 사실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춰 진중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정극에 가까운 느낌을 이어가는 게 나쁘진 않았지만, 공연에 대한 몰입감을 높여주는 긴장감은 어디서도 만나보기가 힘들었으므로 재관람의 의지 또한 사라졌다.
[CAST]
경종 : 성두섭
연잉군 : 신성민
홍수찬 : 정민
이날 만난 세 명의 배우가 그나마 극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줘서 위로가 됐다. 성두섭 배우의 경종은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냉혹한 면모를 모두 갖춘 인물로, 왕의 자리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아픔과 고민을 포함한 쓸쓸함이 대사와 표정은 물론이고 움직임에서까지 묻어나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홍수찬과 친구의 우정을 나누고 싶었고, 연잉군과 따뜻한 형제애를 공유하고 싶었던 섭경종의 마음이 도드라져 애틋함이 전해져 올 때가 많았다.
이와 함께,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의 첫 장면에서 어좌를 붙든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뒷모습을 보이며 등장했을 때의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사극 대사톤이 워낙 잘 어울리는 데다가 연기와 더불어 단단한 발성과 함께 넘버를 소화하는 순간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중에서도 섭종이 가장 좋았던 장면은 '절대군주'를 부르던 때로, 칼을 휘두르는 찰나와 조명의 타이밍이 잘 맞아 떨어진 점도 감탄사를 내뱉게 했다. 마지막 넘버인 '나를 꿈꾸게 하라'와 함께 눈에 띈 표정도 최고였다. '대리청정'에서 흑화하던 경종의 반전 카리스마도 기대 이상이었다.
신성민 배우의 연잉군은 경종을 형님으로 아끼면서도 왕위에 대한 욕심을 놓을 수 없는 인물의 고뇌를 잘 보여줘서 감명깊었다. 당쟁이 대치 중인 위급한 상황 속에서 "노론, 노론이다."를 중얼거리며 자취를 감추던 모습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대리청정'의 "도록도록 눈 돌아가는 소리"라는 가사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연잉군 마음의 소리도 가까이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더불어 연잉군 솔로 넘버인 '하얀 무지개'의 난이도가 상당한데 무난하게 잘 불러줘서 흡족했다. 뿐만 아니라 부자인삼차를 눈 앞에 두고 경종과 마주 앉았던 연잉군의 애처로움 또한 여전히, 눈에 아른거린다.
홍수찬 역을 맡은 정민 배우는 가장 우렁찬 넘버 소화력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외로웠던 경종이 기댈 수 있는 친구로 대하려 했으나 쉽사리 곁을 내어주지 않았던 홍수찬. 그에게는 그 나름의 이유가 존재했기에 안쓰러움을 동반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 홍수찬 의상 위에 새로운 의상을 겹쳐 입고 등장해 숙종을 연기할 땐 풍채가 남달라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경종과 연잉군이 아니라 이윤과 이금이 되어 둘이 함께 부른 '어린 날'도 괜찮았다. 두섭 경종과 성민 연잉군의 화음이 조화를 이뤄 귀를 즐겁게 할 때도 존재했음을 밝힌다. 무대에 등장하진 않지만 '세자 세자(꿈 속의 꿈)' 넘버 안에서 장희빈으로 목소리 출연을 꾀한 최연우 배우의 음색도 환상적이었다.
무대는 평범함과 특별함 사이에 있었고, 소품도 간소화되어 보여졌던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이었다. S석 사이드에서 관람했기에 인형의 표정까진 안 보였으나 역시나 전체적으로 무대를 바라보는 것이 가능해 시야는 쾌적함을 자랑했다.
의상은 괜찮은 듯 안 괜찮아서 굉장히 묘했다. 그나마 멀리서 봐서 다행이었던 거라고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들이 살렸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공연도, 의상도, 전체적으로 배우들에게 의지해 흘러가는 극이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던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이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배우들이 아무리 잘해도 극이 별로면, 더 이상 관람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러니 배우들만 믿고 작품을 올리는 일은 자제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공연의 시작과 같이, 커튼콜과 함께 막이 내린 공연의 끝도 경종의 모습으로 마무리가 되었는데 이 장면도 임팩트가 꽤 있었다. 제대로만 잘 만들어졌더라면, 웰메이드 전통 사극이 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러기 위해 가야 할 길은 멀어 보이지만 말이다.
덧붙여서 배우들 외에 한 가지 더, 라이브 밴드의 연주 역시도 정말 훌륭했다. 장면의 분위기로 인해 격렬해지는 악기 사운드가 심상치 않은 순간을 대변해줘서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없지 않았다.
대한민국 창작뮤지컬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긴 하나 요즘 들어 부쩍 실망하는 일이 많아 슬픔이 사무치는 나날의 연속인데,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역시도 이런 갈증을 해소할 만한 작품은 아니었어서 아쉽고 또 아쉽다. 그러니 부디, 분발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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