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난설 :: 붓으로 써내려간 초희의 삶과 시
뮤지컬 <난설>은 조선중기 천재 여성시인으로 불렸던 허난설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허초희, 난설헌은 초희의 호다. 세상에 나가 마음껏 재능을 펼치고 싶었으나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압될 수 밖에 없었던 시대 속에서 자신의 걸음을 멈춰야 했던 인물이었기에, 허초희의 삶과 시를 이렇게 공연으로나마 만나보게 돼 반가웠다.
이야기는 허초희의 남동생 허균이 역모죄로 끌려와 처형 당하기 전날 밤, 오래 전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균과 초희, 그리고 두 사람의 스승으로 시를 가르쳤던 스승 이달이 함께 나누던 시간 속 대화를 통해 허난설헌의 삶을 조명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문 밖 세상을 향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초희의 절절함은 붓과 종이 안에서 시로 완성되었는데, 화선지를 연상시키는 새하얀 무대 위에 하나 둘씩 나타나던 글자의 움직임이 이를 뒷받침해줌과 동시에 장면에 따른 분위기 연출을 위한 이미지가 극에 힘을 실어줘 보는 재미가 있었다.
국악기를 중심으로 애절한 아름다움이 녹아든 음악을 만나는 것이 가능해 이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중에서도 걸음을 멈추지마, 라는 가사가 담긴 넘버 '구'의 울림이 좋았다. "나는 그러할 것이다" 라고,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던 초희의 당당한 미소가 돋보이던 장면과 겹쳐 보여서 더 그랬다.
하지만 초희는 걸음을 멈추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곳곳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며 시를 쓰고팠던 초희가 아닌, 서책에 푹 빠져 자신만의 세계에 있는 것이 좋았던 균에게만 허용됐던 문 밖 세상이었으므로. 그래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왔다.
변복을 해야만 만나볼 수 있었던 바깥 세상과 원치 않았던 결혼은 천재 시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고, 그리하여 난설헌의 시를 더 많이 맞닥뜨리지 못하게 돼 안타까웠다.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은 8세 때 지은 시라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참고로 이 시는 뮤지컬 <난설>의 넘버로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다만, 뮤지컬 <난설>이 공연 타이틀임에도 불구하고 초희보다 허균이 더 돋보여서 뮤지컬 <허균>이라고 불러도 어색함이 없었던 작품의 흐름은 아쉬웠다. 게다가 이달과 초희의 관계가 단순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 은근한 로맨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뉘앙스가 존재하는 부분도 없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거려야만 했다.
허초희의 인생과 시가 중심내용이긴 한데, 허균과 이달의 기억 속에 자리잡은 초희를 그려내는 게 전부였던 극이라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균에게 "울지마 괜찮다"라고 위로하던 누이의 목소리와 나를 위한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질 때도 있었다.
그렇긴 하나 전반적으로는 좀 많이, 부족한 부분이 드러나는 공연이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왕이면, 초희가 좀 더 도드라졌으면 좋겠다. 이게 제일 문제였다. 덧붙여 무대 보자마자 예전에 관람한 나나흰이 생각났는데, 보면 볼수록 비슷한 무드가 묻어나오긴 하더라. 그래서 그런지 감상평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잔잔한 가운데 서정적인 넘버의 매력이 감명깊게 귀를 사로잡으나 스토리 전개에 있어선 보완이 필요해 보였다. 극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 늘어지는 느낌을 들 땐 좀 힘들었다.
[CAST]
허초희 : 정인지
이달 : 안재영
허균 : 유현석
이 공연 역시도, 배우들은 참 잘했다. 허초희 역의 정인지 배우는 단연 최고였다. 뮤지컬 <난설>에서 오로지 초희만이 다양한 의상을 선보이는데 각양각색의 두루마기와 어두운 색감의 한복까지 안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애타는 마음을 담은 연기와 노래도 완벽했다. 커튼콜에서 확인하게 된 인지 초희의 미소에는 눈물이 났다.
안재영 배우의 이달도 좋았다. 스승다운 면모와 신분의 한계로 인한 불우한 삶을 받아들인 열연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래간만에 확인하게 된 넘버 가창력 역시 훌륭했음은 물론이다. 거문고 연주는 사실 좀 어색하긴 했는데, 손을 다친 상황이었으므로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허균 역의 유현석 배우는 이 공연을 처음 만났는데 마음에 쏙 들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사이에 맞닥뜨리게 된 목소리의 달라짐이 인상깊었다. 누이와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던 아이가 바깥으로 뛰쳐나와 만난 세상은 험난함으로 가득했겠지만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이달은 검은색, 허균은 하얀색 의상으로 의미를 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오로지 초희만이 자신만의 색깔을 자유롭게 풀어내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공연 보면서 울고, 커튼콜에서 기립도 했고, 손수건까지 샀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초연이라 수정을 통해 나아질 가능성은 있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든단 말이지. 그래도 공연장 시야는 확 트여서 이건 참 다행이다 싶었다.
콘텐츠 그라운드 공연장은 무대가 높아서 앞좌석보단 뒷좌석이 훨씬 더 괜찮았다. 뮤지컬 <난설>의 경우에는 무대 바닥도 유심히 봐야 하므로 이 점을 참고해 자리를 잡으면 좋겠다. 그리고 쾌적함을 위해선, 통로 좌석을 집중 공략하기를 바란다.
안타까움의 연속이었으나 붓으로 써내려간 초희의 삶과 시에 일말의 자유가 엿보였던 순간이 있었기에, 그녀의 위로가 공연을 통해서나마 마음에 닿았기에 용기를 얻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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