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티오브엔젤 :: 극중극의 묘미를 한껏 끌어올린 재즈풍 블랙 코미디 누아르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뮤지컬 <시티오브엔젤>의 막이 올랐다. 올해 초연되는 작품이라 궁금증이 앞섰고,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오픈 위크에 공연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1940년대 헐리우드를 배경으로, 영화 '시티 오브 엔젤'의 각본가 스타인의 현실과 그가 써내려가는 시나리오 속 세계가 교차되는 극중극 형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져 흥미로웠다.


이와 함께, 공연의 타이틀이자 스타인이 한창 집필에 임하고 있는 영화 제목인 시티 오브 엔젤(City Of Angels)은 천사들의 도시로 불리는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를 의미한다는 점도 알아두면 도움이 된다.  



하나의 공연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는 극중극의 묘미를 한껏 끌어올린 재즈풍 블랙 코미디 누아르 뮤지컬 <시티 오브 엔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무대 위의 현실과 영화를 나누는 기준이었다. 두 세계는 영상과 조명을 활용해 컬러와 흑백의 색채 대비를 선보임으로써 뚜렷하게 구별이 가능하도록 도와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효과는 스타인과 영화 주인공 스톤이 같은 공간에 존재할 때도 역시나 빛을 발했다. 그리하여 현실과 영화가 동시에 펼쳐지는 순간, 무대의 강렬함이 확 와닿아 시선을 집중시켰다.  


재즈풍 음악을 중심으로 탄생된 넘버의 매력은 18인조 빅밴드가 선사하는 라이브 연주로 극대화되었는데, 재즈 특유의 감미로움이 작품의 개성에 힘을 실어주는 느낌이라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스토리 전개는 상당히 아쉬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1막은 지루했고, 2막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는데 한 번 보는 것만으로 결말이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어려워 고개를 갸우뚱거려야만 했다. 그리고 스타인의 '시티 오브 엔젤'은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영화 제작자 버디의 입김이 거세질수록 이야기가 점점 더 산으로 가기 시작한 건 맞지만, 작가 본인이 설정해 둔 캐릭터들의 평면성 또한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음에 따라 이를 개선하기 위한 수정 작업이 절실해 보였다. 아무래도 시대적 배경이 1940년이다 보니, 2019년 현실과의 갭이 엄청나다는 사실 정도는 미리 알고 관람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극 자체가 매우 올드했다. 1989년의 브로드웨이를 초토화시킨 공연이 2019년 대한민국 공연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를 기대하고 공연을 올린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무려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 뮤지컬 <시티오브엔젤>이 대단한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재밌는 장치가 곳곳에 자리잡았음에도 불구하고 호평보다 혹평을 할 수 밖에 없는 건, 스토리 라인에 대한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제는 더 이상 웃기지 않는 개그로 웃음을 유발하려 애쓰던 장면은 치명타가 되었다. 특히, 버디의 아재 개그로 인해 객석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던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 


재즈풍, 블랙코미디, 누아르, 공연의 장르를 표방하는 셋 중에서 의외로 블랙코미디가 제일 약했다. 웃음이 나와야 할 때에 찾아온 적막을 제대로 경험하게 해줄 정도였으니 말 다한거다.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실은 킬링 넘버라고 이야기할 만한 곡이 곧바로 머리 속에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재즈 선율만으로 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고 보기에 넘어가려고 한다. 



[CAST]

스타인 : 강홍석

스톤 : 테이

버디/어윈 : 정준하

칼라/어로라 : 백주희

게비/바비 : 방진의

도나/울리 : 박혜나

에이브릴/멜러리 : 김소정

판초/무노즈 : 송형은

지미 파워스 : 김준오

제럴드/피터 외 : 이든

엔젤 : 황두현, 이준성, 김찬례, 윤지인

소니/맨드릴 : 김성수

루터/빅식스 : 김대호

멀티 : 이종석, 김연진, 이준용, 안다영


뮤지컬 <시티오브엔젤>의 러닝타임은 1막 85분, 인터미션 15분, 2막 60분으로 총 160분에 달한다. 덕분에 공연 보면서 좀 쳐냈으면 좋겠다 싶은 부분이 생기기도 했다. 다만, 그 와중에 배우들은 진짜 잘해서 무대 위에 집중하다 보니 이런 생각은 절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한 마디로, 아이러니의 절정이었다. 


4명의 엔젤들이 선사하는 화음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의 서막은 모든 배우들의 열연으로 가득 채워져 이로 인한 몰입감이 압도적이었다. 현실과 영화를 오가는 무대 안에서 1인 2역을 맡은 배우들이 보여주는,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장면의 연속은 색다른 짜릿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백주희 배우의 칼라가 확인하게 해준 카리스마가 단연 돋보였고, 귀여운 울리와 야망을 품은 도나 역의 박혜나 배우는 대사톤을 포함해 넘버를 소화하는 스타일까지 차이점을 두고 연기와 노래를 이어가서 감탄을 거듭하게 됐다. 그리고 울리와 게비의 듀엣곡도 마음에 들었고, 지미 파워스의 가창력도 남달랐다. 


스톤과 스타인의 대립이 발발하던 1막 엔딩부터 재미가 있었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2막이 빠르게 흘러감으로써 속도감이 느껴졌다. 2층 객석에서 내려다 본 무대 중, 스타인이 창작의 고통에 몸서리칠 때 바닥에 흩날리던 알파벳들의 향연이 작가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장치로 작용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스타인과 어로라의 테니스 대결이 진행되는 장면에서 테니스 공의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와 이 점도 만족스러웠다.



덧붙여 정준하를 TV 프로그램이 아니라 뮤지컬 배우로 처음 보게 돼 신기했다만, 아직 대사가 입에 잘 붙지 않는지 버벅거림이 잦아서 이 점은 좀 고쳐야겠다 싶었다. 이로 인하여 노래 실력이 좀 더 낫게 들려왔고, 버디보단 어윈 역이 씬 스틸러로 걸맞았다. 


2막 엔딩에 다다라 영화 '시티 오브 엔젤'의 결말을 촬영하는 장면에서 반사판을 든 스탭으로 출연한 인물은 배우가 아니라 진짜 스탭으로 보여져서 이 또한 흥미를 유발했다. 캐스팅 보드에서 얼굴 확인이 안 되던데......맞겠지? 점점 더 꼬여가는 상황 속에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으니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라면, 미안합니다.   



오픈 위크에선 커튼콜 촬영이 허용돼서 운좋게 뮤지컬 <시티오브엔젤>의 커튼콜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DSLR이 무거운 관계로 챙겨가질 않아서 스마트폰 카메라로만 찍다 보니까 건진 사진이 별로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스타인 역의 강홍석 배우는 굉장히 순한 시나리오 작가의 표본을 보여줬다. 버디의 요구에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강하게 의견을 밀고 나가기보단 영화 제작자의 입맛에 맞춰 대본을 수정하면서 자기 자신과도 타협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싸움이 아닌 평화를 사랑하는 인물에 가까워 보였다. 그로 인해 아직은 때묻지 않은, 이제 막 헐리우드에 갓 입문한 초보 작가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적응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홍석 스타인 괜찮았는데, 예상보다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어서 깜짝 놀랐다. 현실이 아니라 영화 속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에 스톤의 어깨가 훨씬 더 무거운 공연이었다. 



영화 '시티 오브 엔젤'의 주인공으로 스타인이 창작해 낸 사립탐정 스톤, 이날의 캐스트는 테이였다. 테이 스톤은 흑백영화의 더빙을 맡은 성우가 연상되는 대사톤으로 현실 세계와 다른 공간을 무대 위에 구현하는데 일조했다. 영화에서 통용되는 비현실성이 컨셉과 잘 맞아 떨어져서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렇게 연기도, 노래도, 한 단계 더 성장한 뮤지컬 배우 테이의 모습이 눈부셨던 공연이었다.


스톤의 서사는 스펙타클함의 결정체로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해서 감명깊었다. 다소 수동적인 스타인과 대비되는 능동성을 지닌 스톤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화에선 기본적으로 무채색, 현실에선 다채로운 컬러를 자랑하며 세계를 구분 지어주는 의상도 볼만 했다. 현실과 영화, 영화와 현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맥을 끊지 않는 흐름도 나쁘지 않았다. 


근데 왜, 대체 스토리가 왜 그럴까? 




김문정 음악감독과 18인조 빅밴드가 공연에서 필요한 장면마다 등장해 라이브 연주와 지휘를 눈으로 볼 수 있게 구성된 포인트도 훌륭했던 뮤지컬 <시티오브엔젤>이었다. 


재즈를 이렇게 오래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 오래간만이라 더 반갑기도 했다. 재즈클럽 블루노트에서 노래하는 가수 바비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빅밴드의 포스는 기대 이상이었다. 김문정 음악감독의 지휘 역시도 마찬가지. 




커튼콜에서 만날 수 있었던 스톤과 스타인의 예사롭지 않은 몸놀림과 투샷은 보너스! 롱코트를 휘날리던 테이 스톤과 유연한 움직임을 보여준 홍석 스타인의 모습도 훈훈함을 자아냈다.



공연의 마무리는 빅밴드의 라이브 연주와 함께였다. 커튼콜이 이루어지며 4명의 엔젤들이 쌓아가던 화음에 귀를 기울이게 됐을 때, 영화 엔딩 크레딧처럼 올라가던 스크린 영상의 자막까지 마주하는 것이 가능해 끝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뮤지컬 <시티오브엔젤>이었다. 이 작품을 위해 노력한 이들의 이름이 빼곡히 쓰여져 차례대로 올라갔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일단 첫 관람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두 번째 관람이 예정되었기에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해 보기로 한다. 재관람까진 권할 수 없겠으나 한 번쯤은 봐도 괜찮겠다. 안 보고 넘어가기엔 무대와 영상, 조명까지 활용을 잘한다. 배우들은 말해 입이 아플 정도고, 재즈 음악을 좋아한다면 관람은 무조건,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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