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호프 :: 이제는, 길 위의 나그네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뮤지컬 <호프>를 관람하기 위해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 다녀왔다. 아르코에서 올라왔을 때 보고 좋았어서 티켓오픈에 맞춰 예매해둔 채 기다린 공연이었는데, 다시 봐도 역시나 감동을 느낄 수 있어 잡아두길 잘했다 싶었다. 길 위의 나그네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시간,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 올랐던 하루였다.
김선영 배우의 호프는 마음을 굳게 닫고 살아온 노인으로의 면모가 강하게 드러나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오직 엄마만을 믿고 따랐던 호프에게 베르트의 등장과 더불어 홀로코스트로 인한 비극이 닥쳐옴에 따라 마주해야 했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카델의 배신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베르트가 남긴 원고만을 부여잡은 채 살아가던 마리의 모습은 절망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겠지. 하지만 결국에는 호프마저도, 마리의 전철을 밟으며 혼자 남아 원고를 지키고자 끊임없이 재판을 이어나가는 걸 바라봐야 해서 안타까웠다.
선영 호프의 절절한 연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심금을 울렸는데 이러한 감정이 노래에 스며들어 목소리를 타고 흘러 나오는 걸 듣게 되니, 절로 눈물이 새어나왔다. 이와 함께, 아르코에서 뮤지컬 <호프>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전율을 상기시키게 해준 78세 노인, 에바 호프의 면모를 오랜만에 깨닫게 돼 이 또한 만족스러웠다.
'콩닥콩닥 콩콩콩' 넘버 가사 중 "엄마는 호프의 우산"을 부를 때 약간의 실수가 있었던 것만 제외한다면 완벽했다. 퇴장 전에 K를 향해 엄지를 척 치켜들며 미소짓던 호프, 이제부터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써나가며 바로 보게 될 에바 호프의 뒷모습은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CAST]
호프 : 김선영
K : 고훈정
마리 : 이하나
과거 호프 : 이예은
베르트 : 김순택
카델 : 이승헌
앙상블 : 임하람, 정재헌, 김지온, 하도빈
6명의 주연 배우들과 4명의 앙상블 배우들이 선보인 조화로운 열연은 역시나 최고였다. 이날은 하나 마리가 무대에 나타났을 때부터 눈물이 터져서 주체가 안됐는데,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해주는 극이었기에 마음 한 켠이 콕콕 아려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포로수용소에서의 힘든 시간을 견뎌낸 후 기차역에서 베르트를 다시 만났으나 예전과 같지 않음을 알게 됐을 때 호프가 마리가 품에 안은 원고 뭉치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때 흩어진 원고 뭉치를 끌어모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페이지 순서에 맞게 정리하던 하나 마리의 표정과 움직임을 잊을 수가 없다.
예은 호프는 에바 호프의 과거를 찰떡같이 소화하며 내게 있어 최애 과거 호프로 자리잡았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에 맞닥뜨린 비극을 시작으로 상처가 쌓이고 쌓여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 중년의 호프로 성장하게 된 모습에서 개연성이 느껴져 공감을 자아냈다. '다윗의 별'에선 마치, 조명에 갇혀있는 분위기가 형성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그로 인한 죄책감에 사로잡힌 어린 호프의 슬픔이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순택 베르트와 훈고지의 듀엣 넘버가 공연 속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순택 재판장의 은근한 유머러스함 역시도 재미를 선사해 긴장감을 완화시킬 수 있어 흡족했다. 승헌 카델은 바지 밑단을 접어 입고 나온 디테일과 호프가 돈을 달라고 절규할 때 가방에서 일부분을 꺼내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는 듯한 의외의 다정함이 눈에 띄었다. 양카델은 비정하게 돈을 흩뿌리는 스타일이었어서 서로 다른 장면의 연출이 재밌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뮤지컬 <호프>를 관람한 날 중에서 이날이 제일 좋은 자리였다. 그래서인지 역시나 보이는 게 더 많아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앙상블 배우들이 갖춰 입은 의상의 변화가 매우 신기했다. 옷의 일부분을 만져주면 새로운 모양의 패턴이 나타났다 사라짐으로써 각기 다른 캐릭터가 되는 순간들이 감탄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
요제프 클라인의 글이 문자가 되어 눈 앞에 펼쳐졌을 때도 좋았고, 다양한 안무와 움직임이 인간의 희로애락과 계절의 달라짐을 확인하게 해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대 왼쪽 상단에서 내리쬐는 조명이 객석에도 빛의 웅덩이를 만들어 때때로 빛나는 찰나를 마주하게 해준 점도 감명깊게 와닿았다.
"저 혼자 추운 겨울을 살던 길 위의 나그네는
오늘,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마침표.
끝."
선영 호프와 훈고지의 조합은, 함께 해온 세월의 무게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가 대단했다. 엄마 마리 다음으로 호프를 가장 잘 아는 존재이기에 그녀 곁에 머무르며 에바 호프를 진짜 에바 호프가 되게 해준 K의 따스함에 추운 겨울의 냉기가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르코에서 만났던 훈고지는 신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갖게 해줬는데, 이날의 훈고지는 호프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친구였음을 확신하게 돼 색달랐고 좋았다.
재판장과 케이가 판결문을 번갈아 읊는 장면도 감동을 더했다. 실제 재판의 판결 내용보다 케이가 힘차게 외치는 에바 호프만을 위한 판결문이 마음을 뒤흔들었음은 물론이다. 덧붙여 너는 너 자신어야만 한다던 케이의 마지막 판결문의 내용은, 호프 뿐만이 아니라 객석을 가득 채운 모든 이들을 위한 것 같아 힘이 났다.
'빛나잖아' 넘버는 요제프 원고를 향한 베르트의 감정으로부터 비롯됐지만, 결국 빛나는 건 사람이라는 점을 일깨워준 공연이라는 점에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 뜻깊었다.
커튼콜에선 매우 귀여웠던 배우들의 모습도 한 장! 자리는 제일 좋은데, 커튼콜 사진은 제일 못 찍은 날이었다. 냥냥냥을 외치며 각기 다른 고양이가 된 배우들도 전부 다 귀여웠다.
더불어 뮤지컬 <호프> 속 "안녕."이라는 노랫말이 들려올 때마다 장면에 따른 울림이 달라져서 이 점도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듯 하다.
오랜만에 만난 훈고지는 역시나 울보였다. 결말에 다다라 두 눈을 감았다 뜨며 환한 미소와 함께 마지막 문장을 외치고 야무지게 마침표까지 찍던 훈고지였다.
훈고지 특유의 홀리함이 여전해서 귀가 즐거웠다.
이제는, 길 위의 나그네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남은 공연 속에서 에바 호프 원캐스트로 공연하게 될 김선영 배우와 건강 회복을 위해 잠시 무대를 떠나 치료에 전념하게 될 차지연 배우, 모두의 건투를 빈다.
에바 호프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니까, 그 이름처럼 살아가게 될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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