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단심 :: 정치 사극 드라마 계원 가연 로맨스 박지연 흑화 한복 맵시 명대사

결말을 포함한 각종 스포일러가 존재하는 리뷰임을 미리 밝히고 써내려가는 오늘의 이야기. 

 

드라마 <붉은 단심>은 친구의 추천으로 시청하게 된 작품인데, 회차가 거듭될수록 의외의 스토리 전개를 확인하게 해줘서 흥미로웠다. 특히, 로맨스를 곁들인 정치 사극의 색다른 묘미를 접할 수 있었던 점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첫 방송을 봤을 땐 정치가 가미된 로맨스 사극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라서 드라마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음을 밝힌다. 

 

 

살아남기 위해 사랑하는 세자빈을 궁에서 떠나보낸 이태는 시간이 흘러 왕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조선을 쥐고 흔드는 좌의정 박계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 안간힘을 쓴다. 반면 역적의 딸로 몰리게 된 유정은 이태의 도움으로 궁 밖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목숨을 건진 뒤 굶어죽는 이들을 두고 볼 수 없어 탁월한 지략과 영민함으로 장사를 시작, 죽림현의 실질적 수장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 속에서 억울하게 처형당한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려 박계원의 손을 잡고 다시금 중전의 자리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보름날이 찾아올 때마다 이태는 왕의 신분을 숨긴 채 유정과 만났다. 그렇게 선비님과 낭자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삶의 유일한 낙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박계원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기에, 이로 인해 벌어지는 상황이 놀라움을 극대화시키고도 남았다. 유정을 자신의 질녀로 둔갑시켜 중전 간택에 뛰어들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로써 내 사람들을 중심으로 남몰래 힘을 모아가던 이태와 박계원으로 말미암아 중전의 길로 나아가게 된 유정의 만남이 흥미진진함을 선사했다. 유정을 앞세워 권력을 보란듯이 휘두르려던 박계원이 진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제 무덤을 팠다는 생각이 들어 귀추가 주목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때부터 드라마 <붉은 단심>의 저력이 발휘되었다. 

 

1회 엔딩
6회 엔딩

참고로 드라마 <붉은 단심>은 회차에 따른 엔딩 맛집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는데, 실제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드는 강렬한 여운이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꼽은 기억에 남는 엔딩은 그림 같은 풍경이 감탄을 자아냈던 1회의 낙화놀이 속 이태와 유정의 만남, 6회에서 이태의 뜻을 따르지 않고 궁에 남기로 결정하며 유정이 베일에 쌓인 얼굴을 드러냈을 때였다.  

 

 

비주얼적으로 탄성을 내뱉게 도왔던 건 1회 엔딩이었고, 출중한 연출력과 배우들의 열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짜릿함을 안겨주었던 건 6회 엔딩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궁에서의 정치적 암투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임을 일깨워주는 풍전연 속 불꽃놀이가 선사하던 핏빛 영상미와 그 속에서 단호한 결의를 다진 표정으로 이태의 눈 앞에 다가온 유정의 얼굴이 의미심장함을 불러 일으켰다. 

 

이태 : 이준

이와 함께 드라마 <붉은 단심>은 로맨스를 맡은 남자 주인공과 정치를 맡은 여자 주인공이 반전을 선사함에 따라 예상을 뛰어넘는 사극의 매력이 도드라져 만족스러웠다. 지금까지 로맨스는 여주, 정치는 남주에게 주어지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전형성을 탈피한 사극 드라마의 강점이 눈에 쏙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덕택에 눈가에 맺힌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던 이태의 애처로운 표정과 그런 이태의 눈물을 닦아주던 유정의 손길이 잊지 못할 명장면 중의 하나로 남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더해 박계원과 유정, 이태와 최가연이 함께 할 때마다 맞닥뜨릴 수 있었던 묘한 긴장감도 눈여겨 볼만 했다. 유정과 박계원은 서로를 향하여 날을 세우면서도 목적을 이루고자 의기투합을 다짐하며 동등한 관계를 확인하게 해주던 순간이 감명깊었다. 무엇보다도 이태의 킹메이커로 본분을 다하고자 고군분투하던 찰나가 인상적이었다. 이때부터는 박계원이 유정을 서포트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최가연과 이태에게선 팽팽한 대립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조아린 이태와 무릎을 꿇은 채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던 최가연은 눈에 보이는 모습과 상반된 태도로 눈길을 잡아끌었다. 계모에게로 잔혹한 말들을 쏟아내던 이태와 그 앞에서 바라는 한 가지를 겨우 입에 올리던 최가연의 면모가 선명하게 포착되었으니 말이다. 

 

유정 : 강한나

이 와중에 드라마 <붉은 단심>을 보는 내내 유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조선에서 여인이 나라를 위해 배움을 실현할 수 있는 자리가 중궁전 뿐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대사가 안타까움을 자아낼 때가 없지 않았다. 조선시대라는 배경만 가져온 허구라면 유정이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판타지가 실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터인데, 유정의 아버지 유학수 및 박계원마저 사내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하고 또 안도하는 모습으로 작품의 방향성을 제시하여 고개를 내젓게 만들던 순간이 있었다.  

 

유정은 이태의 곁에서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간언을 일삼으며 목숨을 내놓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때때로 박계원을 능가하는 전략으로 조선과 내 사람들을 위하여 뒤돌아보지 않고 전진하는 모습에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와 멋졌다. 좌상에게 본인의 정체를 가감없이 밝히고 돌진하는 면모도 대단했다. 

 

여러모로 박계원과는 결이 다른 킹메이커의 위엄이 돋보였다. 

 

박계원 : 장혁

박계원은 조선의 절대 권력자로써 오로지 내가 인정하는 진정한 왕의 탄생을 간절히 바라는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살생과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로 잔혹한 킹메이커의 단면이 포착될 때가 상당했는데, 이태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도중에 유정과 대면하여 희망을 갖게 됨으로써 변화를 선보이던 한때가 그래서 더욱 눈길을 잡아끌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몰락시킨 유학수 가문의 딸과 손잡을 생각을 마다하지 않는 박계원에게서 조선을 향한 진심을 느낄 수 있어 깜짝 놀랐다. 뿐만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고자 유정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굳건함이 감명깊었다. 여기에 더해 장혁의 어마어마한 연기 내공이 발현됨으로써 드라마 <붉은 단심> 속 입체적인 빌런을 만나볼 수 있어 흡족했다.

 

최가연 : 박지연 

대비 최가연은 간택후궁으로 입궐한 선종의 계비로써 박계원의 정치적 동지가 되어 힘을 보태주는 모습 속에서 오랫동안 간직해 온 연심이 곳곳에서 드러나 애처로워지는 순간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박계원이 유정과 손을 잡으면서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빌런으로 악역을 자처하며 분출하던 증오가 상상을 초월해서 이 또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일명 박지연 흑화의 찰나가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고야 말았던 거다. 좌상이 보는 앞에서 가마를 불태우던 장면은 나에게 있어 드라마 <붉은 단심>의 명장면과 같았다.

 

꽃처럼 살기를 거부하고 감춰두었던 흑심을 표출하며 권력을 손에 쥐려 악행을 저지르던 장면들은 서사적 갈등을 심화시킴에 따라 보는 재미를 한층 더 극대화시켰다. 허나 이 모든 것이 그저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어서였음을 알게 되었을 땐 마음이 많이 아팠다.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각종 매체에서 활약하다 드라마 <붉은 단심>으로 시청자들에게 존재감을 제대로 각인 시킨 배우 박지연의 대비 최가연은 내게 있어 이 작품을 끝까지 시청하게 도운 일등공신이었다. 특히, 심혈을 기울인 공기 반 소리 반 발성에 푹 빠져들었다. 4회에서 이태가 간택 후보 중 유정을 닮은 이의 정체를 확인하려 대비에게 전각 안을 보겠다고 청하자 우안한 비아냥거림이 깃든 목소리와 발성으로 "무엇 때문에요?"라는 한 마디를 내뱉는데, 그때 들려 온 목소리 톤과 발성의 매력이 최고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비 최가연으로 분한 박지연이 일깨워 준 한복 맵시 및 자태도 멋스러움 그 자체라 캐릭터 의상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상당했다. 한복이 굉장히 잘 어울려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드라마 <붉은 단심>에서 로맨스를 맡은 주인공이 서브 커플로 등장한 최가연과 박계원이라서 마음이 절로 갔다. 끝이 정해져 있는 비극적 사랑임을 처음부터 알아차리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애절함이 극에 달할 수 밖에 없어 이에 따른 둘의 이야기가 심금을 울렸다.

 

매번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잠깐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어서 애틋함이 커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때마다 수려한 영상미가 한껏 가미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건, 오직 위험천만한 순간 뿐이었다. 덕분에 기대 이상의 명장면이 여럿 탄생했다. 최가연이 물에 몸을 던진 건, 도움을 요청하는 박계원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좌상은 대비를 보호하려다 함께 물에 빠졌다. 

 

이 장면은 슬로우 모션 기법이 활용됨으로써 두 사람의 표정과 움직임이 안쓰러움을 더했다. 

 

흑화한 대비의 살생에 분노한 박계원이 호위하는 군사들을 물리치고 최가연의 목에 칼을 들이대던 장면도 숨죽이게 만들었다. 다만, 계원은 차마 가연을 베지 못하고 멈춰 섰다. 가연 역시도 계원을 의금부로는 보낼 수 없어 의금부는 안된다며 내사옥에 가두라는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그러다 급기야 가연을 대신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 계원과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당부의 말이 드라마 <붉은 단심>의 명대사로 기억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자작나무 숲에서 서로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둘의 모습도 아련하기 그지 없었다. 

 

 

"마마, 살아주십시오.

 

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치욕스럽고 고단하더라도

꽃이 피면 그 꽃을 보면서 하루를,

한겨울 눈이 내리면 그 눈을 보면서 또 하루를,

그리 살다 보면 어느 하루 웃을 날도 오겠지요.

 

저 잠시...잠시 쉬겠습니다."

 

망한 사랑이긴 했지만, 계원의 죽음이 가연을 위한 희생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에서 둘의 로맨스는 길이길이 오래도록 기억되고도 남을 것임이 분명했다. 

 

조연희 : 최리

이와 달리, 16부작으로 완결된 드라마 <붉은 단심>의 결말은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과거 폐빈이었던 자신의 정체를 밝힌 유정이 사림을 등에 업게 됨으로써 좌의정 박계원과 대비 최가연으로부터 벗어나 왕권 강화에 주력하려 했던 이태의 작전이 어긋나 버렸고, 이에 따라 두 사람은 정적의 관계에 놓이게 됐다. 이것은 이태를 폭군이 아닌 성군으로 만드는데 있어 꼭 필요한 견제 세력을 두려는 유정의 계획이었는데, 결국에는 두 사람이 부부의 길을 걸으면서 함께 조선을 다스리게 되는 모습이 해피엔딩을 전했다. 

 

다만 정인이자 정적이 된 둘의 치열한 접전을 조금이나마 만나보게 될 줄 알았는데 긴장감 없이 몇 마디 대사로만 갈등이 해소되며 로맨스 엔딩이 눈 앞에 나타나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 속에서 아버지 조원표의 귀양 소식을 듣게 된 조연희는 중전은 못 될지라도 대비는 되어보겠다며 야망을 활활 불태워서 이 부분은 마음에 들었다. 연희가 정치에 발을 들이면서 또다른 궁궐의 혈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증폭됐다. 

 

그런 의미에서 4명의 중심인물 외에 조원표 역 허성태, 정의균 역 하도권, 조연희 역 최리, 최상궁 역 박성연, 똥금 역 윤서아, 혜강 역 오승훈의 활약도 남달랐음을 언급하고 넘어간다. 

 

그렇지만 끊임없는 반전과 예측불허의 흐름에 따른 긴박감이 몰입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며 색다른 개성을 뽐낸 사극 드라마 <붉은 단심>을 볼 수 있어 행복했다. 배우들의 연기가 반짝반짝 빛났고, 한복의 아름다움과 탁월한 영상미 역시도 눈과 귀를 즐겁게 했던 시간이었다. 드라마 <붉은 단심> OST로 만난 청하의 '새벽에 핀 별 하나'도 좋았다.

 

핏빛 정치 로맨스 사극에 매료됐던 날들을 기억하며, 오래간만의 드라마 리뷰는 여기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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