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낙원의 밤 :: 제주도에서 펼쳐진 핏빛 누아르의 절정

재연 : 전여빈, 박태구 : 엄태구 

넷플릭스를 통하여 공개됨으로써 방구석 1열에서 시청하는 게 가능했던 영화 <낙원의 밤>은 제주도를 배경으로 펼쳐진 핏빛 누아르의 절정을 선사하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조직의 타깃이 되어 죽음을 눈 앞에 둔 남자와 삶의 끝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이어나가던 여자의 만남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는, 예상 가능한 전개 속에서 불현듯 방향을 틀어 예측 불가능한 결말로 안내하며 놀라움을 자아냈다. 

 

 

지금까지 제주도 하면 푸른 밤,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득 채워진 낙원의 이미지가 머리 속에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영화 <낙원의 밤>에선 처절한 복수극으로 말미암아 새빨간 피로 물든 비극의 장소로 맞닥뜨리게 돼 이로 인한 색채와 감정의 대비가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양사장 : 박호산 

양사장이 이끄는 조직의 일원인 태구는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누나와 조카를 교통사고로 잃고 난 뒤,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던 북성파가 사건의 배후에 존재한다는 얘기를 접하자마자 곧바로 복수를 감행한다. 양사장은 사태가 잠잠해지면 러시아로 보내주겠다면서 무기밀매상 쿠토와 조카 재연이 사는 집에 태구를 보내고, 그리하여 세 사람은 낯설고도 어색한 일상에 적응하려 애쓴다.

 

가족들은 삼촌으로 인해 러시아 마피아에게 몰살당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았으나 수술을 한다고 해도 한국에선 10%, 미국에선 20%의 생존률이 전부인 재연에게 인생은 지독한 암흑과도 같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매 순간마다 터져 나오는 거침없고도 솔직한 말투와 당당한 태도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중저음으로 낮게 깔리는 전여빈의 목소리와 캐릭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에 따른 싱크로율도 완벽했다. 

 

그 와중에 쿠토를 대신해 공항에서 픽업을 완료하고 집으로 운전해 가던 차 안에서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 온 바람이 얼굴을 파고들자 신경질을 거하게 내던 재연과 머쓱한 표정으로 창문을 닫던 태구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영화 <낙원의 밤>은 한때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거짓과 배신으로 점철된 조직의 세계에서 희생양이 되어버린 태구와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의 삶을 사는 재연이 참혹한 운명으로 엮이면서 함께 보낸 찰나의 시간을 밀도있게 담아내며 엔딩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끝이 정해진 길을 걷는 것과 다름 없었던 두 사람이 마주하게 해준 생의 활기는, 서정적인 흐름 속에 긴장감을 풀어주는 위트가 더해짐으로써 주변에 도사린 위험을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특히, 바다 근처 횟집에서 물회와 한라산 소주를 즐기던 장면은 빼놓을 수 없다. 다음에 제주도 여행을 가면 꼭 실행에 옮길 위시리스트로 저장해 두게 할 정도로 임팩트가 대단했다. 뿐만 아니라 신발을 벗고 바지를 접어올린 채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바다를 바라보던 뒷모습도 잠시나마 감상에 빠지도록 도왔다.  

 

마이사 : 차승원 

영화 <낙원의 밤>은 사실, 스토리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지 뻔히 보이는 작품이었다. 복수가 복수를 낳음으로써 피의 향연이 예고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편이 아닌 같은 편으로부터 비수가 날아와 꽂힐 것임을 알았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그 와중에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혀 물 불 가리지 않았던 양사장과 계산만 정확하면 의리있고 젠틀하게 일을 매듭 지을 줄 아는 마이사의 온도차는 대단했다. 그냥 양아치와 무게감 있는 빌런은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얄밉기 그지 없었던 양사장 역의 박호산은 물론이고, 최근에 예능 프로그램인 <삼시세끼>의 차셰프로 자주 봐왔던지라 오래간만에 강렬한 눈빛과 거침없는 욕설을 내뱉는 마이사 역의 차승원 또한 신선하게 다가왔다. 결론적으로, 두 배우의 전혀 다른 악역 연기가 감탄을 터뜨렸음을 밝힌다. 

 

그렇게 어둠의 그림자에 둘러싸여 얽히고 설킨 관계 속에서 결국 두 사람만 남았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느낀 감정은 아마도 사랑이 아닌 연민이었을 테고, 로맨스보단 동료애로 나아가는 과정에 가까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이들이 나눠가질 수 밖에 없는 절망의 공감대가 고스란히 전해져 오며 마음을 울렸다. 

 

 

이와 함께 거대한 폭풍이 휩쓸고 간 집을 떠나 지인의 펜션에서 잠시나마 숨을 고르며 유난히 고요한 시간을 보내던 태구와 재연의 모습이 서서히 줌아웃으로 비춰지던 장면도 눈여겨 볼만 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두 개의 방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쉽게 잠들지 못하던 두 사람에게 찾아오는 새까만 밤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뻔한 내용으로 구성된 스토리 라인 속에서도 배우들의 열연은 빛났고, 주연으로 모습을 드러낸 엄태구의 존재감도 기대 이상이었다. 특유의 허스키한 보이스와 서늘한 아우라가 캐릭터와 잘 맞아 떨어져서 흥미로웠다. 엄태구가 맡은 캐릭터가 박태구라는 점도 재밌었음은 물론이다. 

 

피가 낭자한 누아르의 익숙함에 적응했다 싶을 때쯤, 예기치 않았던 반전이 튀어나와 영화 <낙원의 밤>이 감춰두었던 진면목을 표출함과 동시에 생각지도 못한 짜릿함을 선사했다. 재연이 완성시킨 처연한 결말은 죽음을 뛰어넘는 복수극의 종착지로 안내하며 이 세상에 없는 낙원을 향해 손을 뻗게 도왔다.

 

지금까지 만나 본 누아르와는 결이 다를 뿐더러 뚜렷한 개성과 차별성을 지닌 작품으로 혀를 내두르게 했던 엔딩은 잊지 못할 명장면으로 남을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었다. 아니, 보기를 정말 잘했다 싶다. 

 

환상적인 절경을 자랑하는 제주도의 감성을 멋드러지게 담아내며 허를 찌르는 핏빛 누아르를 경험하게 해준 영화 <낙원의 밤>이었다. 재연 덕택에 온전한 인과응보의 마무리와 복수의 끝을 확인하게 되어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연기와 통쾌한 결말에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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