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 인간의 기억은 가볍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아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는 로봇과의 만남을 통해 성장하는 노인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중년 여성의 서사를 중심으로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가며 따뜻한 감동을 선사하는 점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싱글 마을에서 외로이 살아가던 엠마가 자신에게 배달된 로봇 스톤에게 마음을 열면서 시작된 공연은 초반에 맞닥뜨려야만 했던 침울한 분위기를 금세 벗어나 유쾌한 웃음을 건네는가 싶더니, 어느새 예상치 못한 반전을 펼쳐 보임으로써 호러와 스릴러를 넘나들며 기상 천외한 작품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공개된 포스터를 봤을 때 아련함으로 가득 채워진 러브 스토리에 초점을 맞춘 극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한참 빗나갔다. 하지만 의외로, 그래서 더 좋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여러 장르가 포진된 공연만의 묘미가 살아 숨쉬고 있었기 때문에.


다만, 신선한 자극을 전해주기보단 지금까지 익숙하게 봐왔던 설정들이 작품 안에 대거 포함되어 있어 이로 인한 아쉬움은 존재했다. 그러한 이유로, 엠마의 기억을 찾는 여정 속에서 활용되는 소품이나 장치의 뻔함이 지루함을 경험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여지가 없지 않아 보였다. 



창작뮤지컬로 초연을 올린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포인트 역시 충분했기에 은근히 매력적인 공연으로 자리매김했다.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와 노래에 감탄을 이끌어낸 조명의 쓰임새, 넘버의 아름다움이 스토리적인 단점을 보완해줌으로써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엠마 : 정영주 / 스톤 : 이율 / 미아 : 박지은 / 버나드 : 최석진]


이 공연의 타이틀롤로 무대에 선 영주 엠마의 캐릭터 싱크로율은 100%로 매우 완벽했다. 정영주 배우를 소극장 무대에서 본 건 처음이었는데 섬세한 디테일 연기를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마음을 닫고 살아온 세월이 오래지만, 말문이 열림과 동시에 터져 나오던 특유의 친근함과 다정함이 최고였다. 


율스톤은 그야말로 인간에 가까운 로봇으로, 로봇답지 않은 온기를 간직한 것이 강점으로 느껴졌다. 택배 물품에 불과했던 맨 처음, 로봇다웠던 기계적인 말투가 활성화를 거침에 따라 인간답게 변한 이후로 엠마만을 향한 따스한 시선과 애틋함이 얼굴 표정에 가득 드러나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문을 열어주지 않는 엠마를 향한 애원을 담아 "택배 도착했습니다."에 이어 "택배가 당도했습니다."를 끊임없이 반복하던 장면에 이어 집에서 쫓겨나자 문 밖에 주저앉은 채 돌부리가 된 모습은 웃음을 자아냈고, 잠든 엠마를 향해 '피아노 자장가'를 나즈막히 불러주던 뒷모습은 애처롭기 그지 없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직접 연주하던 때가 찰나로 끝이 나서 조금 섭섭했지만, 이 마음은 피아니스트 못지 않은 열연을 손과 온 몸으로 표현해내던 장면을 통하여 달래는 게 가능했다. 로봇만의 자부심을 자랑스럽게 표출하던 순간의 귀여움과 귀를 기울이게 하는 목소리를 포함해 모든 것이 잘 어울렸던 율스톤이었다. 커튼콜에서마저 엠마에게 시선을 고정하던 눈빛도 환상적이었다. 빨간 구두를 신은 엠마가 "잘 어울려?"라고 묻자 "네, 여전히."라고 대답함으로써 은근한 복선을 경험하게 해준 장면도 의미있었다. 



배우 개개인은 물론이고 영주 엠마와 율스톤의 합이 찰떡이라 더 기억에 남는 공연이었다. 장난스러움이 얼굴에 묻어나는 둘의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마지막 듀엣 넘버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동안 눈물 흘리며 미소짓던 장면도 잊지 못할 것 같다. 이날 만나 본 최고의 명장면이기도 했다.


지은 미아는 멀티 캐릭터로 다채로운 연기와 노래 실력을 뽐냈다. 싱글 마을에 사는 할머니가 되어 오늘 먹을 식사 메뉴를 고민하다가 분짜를 얘기했을 때, 대학로에 자리잡은 쌀국수집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석진 버나드 역시도 다양한 인물을 소화하며 일취월장 성장기를 만나게 해줘 만족스러웠다.  


다만 스톤의 존재 유무에 대한 의문이 명확하게 해소되지 않는 점은 관객들에게 있어 불친절함으로 와닿을지도 모르겠다. 이날 마주한 두 번째 관람으로 인해 실재가 아닌 환상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긴 했지만, 이야기의 핵심에 자리잡은 중심 인물을 단번에 파악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 요인일 것이 분명했으므로. 첫 관람에서 현실이라고 여겼던 상황들이 뒤바뀌니 공연 자체가 달라 보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창작뮤지컬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극이라는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노인 중에서도 중년 여성이 작품을 끌고 가는 공연이 흔한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뿐만 아니라 엠마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억을 지켜보는 동안 공감대가 형성됐던 건, 우리 또한 나이를 먹으며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떤 기억이든, 과거의 추억을 통해 미소 지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존재가 인간임을 다시금 증명해주는 에피소드가 무대 위에 있었다. 이로 인해 땡베리 넘버 중에서 스톤이 인간의 기억은 너무나 가벼워서 잊혀지고 사라진다고 말하자 엠마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숨어있는 것 뿐이라고 받아칠 때 비로소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무대 전체가 엠마의 봉인된 기억 저장소였다. 그리하여, 먼지가 쌓인 것으로도 모자라 닳고 닳아 색채를 잃어버린 쓸쓸한 공간에 다채로운 빛깔이 스며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늦은 건 아니었다. 스톤이 커튼을 열어 젖히며 쏟아지는 햇살의 빛에 살짝 웃음을 짓자마자 엠마가 다시 커튼을 꽁꽁 닫아둠으로써 맞닥뜨려야 했던 어둠의 대비가 이로써 더욱 흥미로움을 자아냈다. 


서랍 안에 꽁꽁 숨겨둔 기억 꺼내기에 성공한 엠마의 삶을 응원한다. 여전히 혼자이긴 하지만 예전과는 같지 않을 시간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가장 인상깊은 땡베리 넘버는 '가짜 같은 세상에 진짜'였다. 이 노래 안에 엠마의 안타까운 과거와 더불어 스톤의 존재가 꼭 필요할 수 밖에 없었던 현재에 이어 눈앞에 다가올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만드는 의미심장한 노랫말이 담겨 듣는 내내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공연도 좋았고, 커튼콜도 아름다웠다. 커튼콜 데이를 제외하고는 촬영이 금지되었는데, 보고 나니 그 이유가 납득이 됐다. 단순히 인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들의 표정과 손짓, 움직임 전부가 공연의 연장선상으로 감동을 더해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만나 서로를 꼭 안아주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름으로써 나이를 먹게 될수록 여운이 더 짙게 마음을 감싸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와 함께, 공연장에서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를 관람했던 기억도 당연히 행복한 순간으로 자리잡을 것임을 확신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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