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 눈송이 같았던 토마스와 앨빈의 이야기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겨울이 찾아올 때마다 생각나는 공연 중의 하나다. 뿐만 아니라 솜이라는 애칭만으로도 몽글몽글함이 피어오르게 만드는 작품인데, 톰과 앨빈의 행복한 추억을 따라가다 보면 확인할 수 있는 시간여행 속에서 눈송이를 닮은 애틋함이 느껴져 마음이 아려오곤 한다.
토마스와 앨빈이 처음 만나 친구가 됨으로써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순간을 지나 둘의 삶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감으로써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이 교차되며 보여지는 이야기가 따뜻한 미소와 공감을 경험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함께 공연에서 언급되는 영화 '멋진 인생(It's Wonderful Life, 1946)'에 대한 호기심 유발과 더불어 앨빈으로 인해 토마스에게 찾아온 선물 같은 책, 마크 트웨인이 집필한 '톰 소여의 모험'의 내용을 다시금 머리 속에 떠올리게 할 정도로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많았다.
두 친구의 추억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지만 톰의 시점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 전부라 앨빈의 진심이 어땠을지는 알 길이 없지만, 두터운 우정이 건네는 마음의 온도는 한겨울을 잊게 해줄 만큼 따스함으로 가득했을 거라는 사실을 만큼은 의심치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으며 환경에 따라 변화하기에 이로 인한 갈등도 존재했지만 그것 역시도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을 테니 말이다.
스토리 전개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넘버의 매력 또한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강점이다. 톰이 불러주는 '나비(The Butterfly)'는 가사와 멜로디의 감동이 배가 되는 곡으로 솜을 말할 때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넘버이기도 한데, 언제 들어도 가슴이 벅차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참고로 이날 공연에서 내가 가장 울컥했던 건 '이게 전부야(This Is It)'의 반주가 흘러나올 때부터였다. 노래를 통해 앨빈이 톰을 꼭 안아주는 것 같아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머리 속에 없는 이야기를 찾아 헤매던 톰을 위한 앨빈의 다정한 위로 역시도 기억에 남는다.
"네 머리 속에 이야기만 몇 천개야, 톰. 왜 없는 이야기를 찾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때때로 그렇게, 알지 못하는 이야기와 삶을 붙잡기 위해 방황하는 찰나가 생기는데 그때 앨빈의 말을 기억한다면 분명히 길을 잃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CAST]
토마스 위버 : 강필석
앨빈 켈비 : 정동화
내가 만난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주인공들은 토마스 위버 역의 강필석 배우, 앨빈 켈비 역의 정동화 배우였다. 연기와 노래가 적절하게 어우러짐으로써 오감을 만족시키던 필석 톰과 친구를 향한 깊은 애정을 과감 없이 드러나는 동화 앨빈의 조합이 멋졌다.
그리고, 장례식장을 지켜보기 위해 몰래 잠입하는 장면에선 동화 앨빈의 휘황찬란한 움직임이 감탄을 자아냈다. 그런데 그걸 본 필석 톰이 "이 자식이......!"를 나지막하게 내뱉은 이후에 넥타이를 느슨히 조절하는 것으로 모자라 셔츠 소매 단추까지 풀더니 옆돌기 동작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객석에선 놀라움의 탄성과 술렁거림이 동시에 울려퍼졌고, 본인 역시도 웃음이 터져버려 재밌었다.
지금껏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를 통해 봐온 필석 톰의 같은 장면 중, 이날이 가장 퍼펙트했다. 덕분에 가장 안전하고도 무사히, 앨빈의 뒤를 따라 톰 역시도 원하는 장소에 잘 도착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환한 미소가 눈부신 동화 앨빈의 변함없는 순수함과 타성에 찌들고 지친 필석 톰의 전혀 다른 모습이 대비됨에 따라 과거 어린 시절과 성인이 된 현재를 돌아보게 됐고, 잔잔한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온기가 가득 퍼져 나가 위안이 됐다.
때마침 커튼콜 데이에 보러갔기에,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만의 멋진 무대와 배우들을 사진에 담을 수 있어 이 또한 좋았다.
2층 맨 뒷좌석에서 관람했는데, 시야 방해 없이 공연과 함께 하게 돼 즐거웠다. 거리감은 당연히 멀었지만 전체적으로 공연을 조명하는 것이 오랜만이라 나쁘지 않았다.
앨빈이 운영하는 책방이자 톰의 머리 속 저장소를 표현해 낸 무대의 쓰임새도 훌륭했다. 곳곳에서 종이뭉치를 꺼내들게 되면서 맞닥뜨리는 게 가능했던 둘의 이야기도 아름다웠다.
앨빈에게 톰은 유일한 친구이자 가끔씩은 애증의 대상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의 송덕문을 머리 속에서 자신만의 단어로 조합해 즉석에서 풀어내는 모습을 보고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을 직감했지만, 세상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오래도록 갇혀 있어야만 했던 소년의 어둠이 느껴졌고 오히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톰이었으므로.
톰이 앨빈의 얘기를 토대로 작성한 나비의 제목을 듣는 순간 책을 떨어뜨리던 장면에서 감지됐던 충격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톰의 추측에 불과할 뿐이지만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기도 했다.
그래도, 하나 뿐이었던 진정한 친구를 향한 앨빈의 진짜 속내 만큼은 톰에게 가 닿았을 거라고 믿는다. 디시짓에서 그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으니까.
톰에게 부탁한 아버지의 송덕문을 읽어보고자 접힌 종이를 펴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던 점도 안쓰러웠던 앨빈이었다. 옷도 품이 커서 더 애처로워 보였고.
마냥 다정하진 않고 은근한 서늘함을 담고 있어 이로 인한 감정의 변화가 전해져 오는 것 또한 동화 앨빈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근데, 눈싸움은 진짜 못하더라. 뮤지컬 존 도우의 주인공 윌러비가 전직 야구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중률 제로라니......폼은 야구선수 저리가라였는데 눈덩이가 톰에게 가까워지는 때가 없어서 매우 신기했다.
오히려 톰이 앨빈의 얼굴에 스매싱을 날려서 깜짝 놀랐다.
동화 앨빈 특유의 해사한 웃음은 커튼콜에서도 두드러졌다. "아는 걸 써."라는 말이 전하는 깊은 메시지를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어 의미깊은 공연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알면서도, 쉽지가 않은 걸. 그래서 더더욱 톰의 고뇌를 이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필석 톰의 나비는 여전히 최고였고, 손가락으로 나비를 만들어 움직이는 장면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나비의 날개짓에 세상이 변한다는 가사가 꽤 오랫동안 마음을 울렸다. 단순한 나비효과 그 이상의 가치를 깨닫게 도왔으니.
앨빈의 선택에 대한 죄책감과 송덕문에 대한 압박감이 불러낸 친구의 유령이 타임머신처럼 되돌려 놓은 그들의 반짝였던 시간들을 통해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마주보게 된 톰을, 그런 의미에서 응원하고 싶어졌다.
톰이 앨빈에게 잘못한 일도 많았지만, 앨빈 역시도 큰 상처를 남겼으니까.
공연 자체에 큰 굴곡이 없어서 집중력을 놓치면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극이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인데, 이날의 공연은 달랐다. 나이를 먹어가고 여러 번 관람하게 되면서 작품의 내면에 깃든 또다른 의미를 깨달아가게 됨에 따라 와닿는 부분들이 더 많아져서 신기했다.
좋은 공연은 특별한 변화를 주지 않아도, 작품이 무대 위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던 때라 더더욱 가치있게 여겨졌다. 올해는 솜 OST까지 발매돼서 더 기쁘다.
종이 뭉치를 날리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선보이던 앨빈과 톰. 하얀 눈이 무대 위를 채우던 장면의 황홀함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커튼콜마저도 눈부셨다.
겨울과 잘 어울리는 공연이라 추운 계절마다 보게 되는 솜. 2018년에 이어 다가오는 2019년 새해까지 만나볼 수 있게 돼 반갑고 다행스럽다.
커튼콜 데이 덕택에 사진이 많은데,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 같아서 다 남겨둔다. 커튼콜 데이를 또 해도 맞춰갈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으니 기념하는 의미로.
손으로 잡을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사라져버리는 눈송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톰의 기억 속에 영원한 앨빈과 둘의 우정 역시도 눈 내리는 날에 더 자주 생각이 나겠지.
눈송이 같았던 토마스와 앨빈, 남은 겨울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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