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브론테 :: 이야기를 짓는 작가들의 삶 (허혜진, 이아름솔, 송영미)
2022년 올해 창작 초연으로 무대에 오른 뮤지컬 <브론테>의 인기가 뜨겁다. 9월 4일에 개막한 이후로 점차 입소문이 퍼져 나가더니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11월 13일까지 연장 공연이 확정됨과 동시에 현재 전석 매진 행렬을 이어나가는 중이라 놀라우면서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 작품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글쓰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던 빅토리아 시대에 작가의 꿈을 키우며 창작열을 불태웠던 샬럿, 에밀리, 앤 브론테 자매들의 시간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그리하여 실존인물의 삶을 토대로 상상력을 덧붙여 탄생된 줄거리 안에서 맞닥뜨리게 된 이야기가 흥미로움을 자아냈다.
세 사람은 에밀리가 들었다는 벌판의 목소리를 주제로 글을 써서 함께 책을 내기로 결정하며 집필에 골몰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죽음을 지켜봤다는 한 통의 편지를 마주하게 됨에 따라 예상치 못한 균열과 갈등이 요크셔의 황야를 감싸며 혼란을 불러 일으키고야 만다.
[CAST]
샬럿 : 허혜진
에밀리 : 이아름솔
앤 : 송영미
이로 인하여 브론테 자매가 각기 다른 아이디어를 글감으로 삼아 저마다의 개성 넘치는 이야기를 완성시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여자라면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하거나 가정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던 과거에 본인들만의 재능을 발견하여 갈고 닦으며 꿈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굳은 의지가 감명깊게 다가왔음은 물론이다.
성별을 감추고자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이라는 중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필명으로 출간한 시집이 기대했던 만큼의 수확을 안겨주진 못했으나 그럼에도 심기일전하여 소설 발표에 심혈을 기울이던 세 자매의 순간들이 강렬한 여운을 전해주었다. 덕분에 제인 에어(샬럿 브론테), 폭풍의 언덕(에밀리 브론테), 아그네스 그레이(앤 브론테)를 향한 순탄치 않은 고뇌의 여정이 배우들의 호연을 통해 선명하게 와닿아 심금을 울렸다.
허샬럿은 언니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첫째의 역할을 떠맡게 됨으로써 엄격한 리더에 등극, 서적 출판과 글쓰기를 진두지휘하며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면모가 똑부러져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와 함께 다정하고 여린 심성 속 장난기 많은 모습이 포착돼 이 점도 눈여겨 볼만 했다. 방 안에 틀어박힌 에밀리를 나의 장미꽃이라고 부르며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돕던 한때가 유독 기억에 남았다. 에밀리의 글에 대해 비판하며 거침없이 몰아붙일 땐 성공을 갈망하는 샬럿의 진심이 절절하게 느껴져 안타까운 맘이 들기도 했다.
아름솔 에밀리는 글쓰기에 미친 인간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캐릭터로 눈을 떼지 못하게 도왔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들판을 질주하는 동안 오직 자신만이 들을 수 있었던 목소리에 집중하여 그 순간의 영감을 바탕으로 눈을 반짝이며 펜을 쉴새 없이 움직임으로써 남다른 재능이 꽃을 피우는 과정을 바라볼 수 있어 탄성을 내뱉지 않는 게 더 어려웠다. 병든 상태에서 눈이 보이지 않아 코로 냄새를 맡으며 책을 찾아내던 디테일과 더불어 죽음은 악마적인 것이 아니라며 슬퍼하는 앤을 다독이던 장면도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겉으로는 강해 보일지언정, 세 자매 중에서 가장 유약한 내면을 보유한 인물이 바로 에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영미 앤은 글에 대한 자신감은 부족했으나 그럼에도 작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단단함이 돋보였다. 샬럿과 에밀리의 싸움을 중재하고 편지의 주인을 찾는 탐정으로의 소임을 다하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자유는 우리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명대사를 맞닥뜨리게 해줘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셋 중에 나이로만 따지면 막내였지만, 자매들 중 유일한 정신적 지주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샬럿과 에밀리의 대립이 극에 치닫던 찰나가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 순간도 있었다. 이때 앤이 두 사람의 손을 잡고 화해를 도모하며 자신이 하는 말을 따라하라고 했을 때 작은 목소리로 얼버무리던 에밀리는 귀여웠고, 그로 인해 어느새 샬럿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려서 그게 참 다행스러웠다.
세 배우의 연기와 노래가 한데 어우러지니 눈과 귀가 즐거울 수 밖에 없었다. 개인의 역량은 물론이고 함께 넘버를 소화할 때 들려오던 화음도 기대 이상이었던지라 볼수록 만족스러움이 극대화되었다. 다만, 예상보다 평이했던 서사의 흐름과 반전에는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음을 밝힌다. 이러한 이유로 묘하게 늘어지는 부분이 존재해서 몰입을 방해할 때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트리플 캐스팅으로 구성된 배우들과 음악의 매력을 뮤지컬 <브론테>의 강점으로 꼽고 싶다. 무대 양쪽 사이드에 자리잡은 라이브 밴드의 악기 연주가 환상적이었고, 넘버 리스트에 포함된 OST 역시 버릴 곡이 하나도 없었다. 이중에서도 아름솔 에밀리의 광기 어린 열연과 탁월한 성량에 마음을 빼앗겼던 솔로 넘버 '폭풍우', 샬럿과 에밀리의 치열한 의견 충돌이 극치에 다다랐던 '찢겨진 페이지처럼'이 뇌리에 콕 박혔다. 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뼈아픈 선택을 통해 예정된 결말로 나아가던 상황이 슬픔을 자아냈다.
여기에 더해 대학로 자유극장 C열 오른쪽 블럭 통로에서 공연을 관람한 소감은 이렇다. 한 마디로, 배우들의 연기에 빠져들어 무대 위의 스토리에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자리였다고 확신한다. 공연 초반에 앤의 모습이 시야에서 벗어나 살짝 가려질 때가 없지 않았지만, 그걸 제외하면 모든 것이 흡족함을 일깨워준 좌석이었다. 덕분에 배우들이 웃을 때 미소 짓고, 울 땐 같이 눈물 흘리며 같은 감정을 공유할수 있어 좋았다.
뿐만 아니라 커튼콜에서 기립박수로 화답할 수 있어 행복했다. 결국엔 나도 브론테라는 이름을 예전보다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으니, 뮤지컬 <브론테>의 가치가 입증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침대에 자매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을 때 허샬럿이 에밀리에겐 꽃다발을, 앤에게는 책을 건네던 디테일도 멋졌다. 덕분에 공연의 연장선상에 놓인 커튼콜의 묘미가 도드라져 이 점도 뜻깊었다.
이렇듯 뮤지컬 <브론테>의 성공이 확실시 된 시점에서 여성서사로 이루어진 3인극의 파워 또한 증명이 된 만큼, 앞으로도 대한민국 공연계에 이러한 창작극이 더 많이 등장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이제 막 초연된 거라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 보였지만, 일단은 산뜻한 시작을 일구어 냈으니 이로 인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글쓰기를 위한 자유를 쟁취해 꿈을 펼쳐내려 애쓴 브론테 자매를 포함하여 억압된 시대적 상황에 굴하지 않고 뜻한 바를 성취하고자 고군분투했던 여성들이 과거에도 많았음을 잊지 않을 것이다. 샬럿, 에밀리, 앤의 목소리로 깊은 울림을 주었던 공연의 마지막 내레이션이자 관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면서 말이다.
"때로는 모질고 때로는 슬프기만 한 삶이었으나
우리는 우리의 이름으로 내내 치열했고,
존재했음으로 이미 충분했다.
또 어느 곳, 나와 닮은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가 닿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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