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알앤제이 :: 소년들의 세계 속에서 재탄생된 로미오와 줄리엣
다정한 밤이여, 부디 그날 내게 선사한 달콤하고도 치명적인 꿈 속에서 영원하여라.
연극 <알앤제이>는 셰익스피어의 고전 중 하나로 불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규율이 엄격한 가톨릭 남학교에 재학중인 4명의 소년들이 금서로 일컬어지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빠져들어 낭독을 뛰어넘는 역할극을 통해 캐릭터에 몰입하게 되면서, 현실과 희곡의 경계가 흐릿해짐에 따라 보여지는 결말의 여운이 묘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극이었다.
억압에서 벗어나고픈 학생들이 금기를 깬 시간들의 향연은, 무대와 더불어 객석 사이사이에 마련된 의자와 테이블을 통해 또다른 일탈을 발산하며 흥미로움을 전했다. 이와 함께 많지 않은 소품 가운데서 상황에 따라 적재적소에 활용되며 휘날리듯 나부끼던 붉은 천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냄으로써 강렬함을 심어주었다.
다만,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명작으로 워낙 유명해서 처음 만나게 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함은 덜했다. 배우들의 연기가 색다른 매력을 경험하게 해준 건 맞지만,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4명의 남학생이 나누어 선보이는 것이 그리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게 교복을 차려입은 채 작품에 심취한 배우들의 열연으로 공연장이 가득 채워지고 있을 즈음, 현실을 깨우는 캐릭터를 맞닥뜨린 학생이 희곡에서 요구하는 것과 다른 감정을 쏟아내며 변화를 시도했을 때 비로소 눈이 번쩍 뜨였다. 특히, 수업 시간에 체벌에 노출됐던 학생3이 낭독을 이어나가던 와중에 대본 안의 폭력성을 마주하고 주저하던 순간이 인상적이었다.
셰익스피어만의 은유가 돋보였던 대사의 아름다움이 연극 <알앤제이> 속 네 명의 배우들로 인해 시원스러운 성량 속에서 말이 되어 터져나왔을 때의 감동도 전율을 느끼게 했다. 학생들의 현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왔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았으나 금서를 함께 읽어 내려가고 난 뒤, 예전과는 분명히 다를 소년들의 미래가 눈에 선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다 싶었다.
[학생1 : 문성일 / 학생2 : 강승호 / 학생3 : 손유동 / 학생4: 이강우]
로미오와 줄리엣을 중심으로 1인 다역을 맛깔나게 연기한 배우들의 모습이 훌륭했다. 학생2를 맡은 강승호 배우는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됐는데, 굵은 저음이 귀에 쏙 들어왔다. 줄리엣이지만 애써 꾸미지 않고 본연의 목소리에 감정을 실어 표현하는 모습이 기대 이상이었다.
현실과 환상에 개의치 않고 몸과 마음이 이끄는대로 사랑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던 학생1은 극중에서 로미오만을 맡았던 것처럼 일관된 가치관을 표출했다. 그러나 넷의 낭독이 끝났을 때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통하여 희곡에서 만났던 비극이 아닌 자신만의 희극을 완성하고자 가장 먼저 움직이며 파문을 일으킬 줄 아는 용기를 지녔기에 절로 눈길이 갔다.
금서를 발견하기 전 읽었던, 남자와 여자로 구분지어져 정형화된 문장의 틀을 스스로 깨뜨리며 교과서를 찢고 교복을 벗던 찰나가 그래서 더 의미있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힘차게 머리 위로 던졌는데, 조끼가 문성일 배우의 얼굴에 명중해서 이건 좀 재밌었다.
무대의 조명과 음악의 쓰임새도 좋았다. 막이 내림으로써 암전과 더불어 흘러나오던 멜로디가 학생들의 행보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하게 만들었기에 이로 인한 짜릿함이 없지 않았다.
남학생 버전을 보고 나니, 여학생 버전도 문득 궁금해졌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배우들도 꽤 많아서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공연을 보는 동안 마음을 파고드는 대사들이 많았는데, 그래도 기억해야 한다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공연을 관람했던 날에 학생2로 무대를 종횡무진했던 강승호 배우가 꼽은 최애 대사라 더 좋다.
소년들의 세계 속에서 재탄생된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새로이 접하게 된 이야기가 마음에 진하게 남았으니, 시간이 될 때 다시금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읽어보려고 한다. 네 학생들 못지 않게 나 또한 분명히 달라졌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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