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킬롤로지 ::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에 찾아온 비극을 이야기하다
연극 <킬롤로지> 재연 자둘은 첫 관람 때보다 더 깊이 공연에 빠져드는 것이 가능해 흥미로웠다. 보면 볼수록 촘촘하게 나열된 퍼즐의 텍스트를 완성해 나가는 독백의 묘미가 매력적이라 한층 더 집중해서 바라볼 수 있었다.
현실과 게임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에 맞닥뜨려야 했던 비극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세 사람이 차례대로 무대에 등장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말을 이어 나갈수록 몰입감을 더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급기야 그들의 논리에 점점 더 설득당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하여 당황스러운 기분을 감출 수가 없게 됐다.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했던 알란, 폴, 데이비의 삶에도 나름대로 그만한 이유가 존재함을 깨닫고 나니, 기분이 묘해졌던 거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셋의 얘기만으로는 게임으로부터 비롯된 현실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리하여 세 사람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계속해서 페달을 밟는 셈이었지만 그날의 나는 달랐다. 공연 속 독백과 독백 사이에 숨겨진 문맥을 온전히 이해하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텍스트의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순간을 통해 더 이상 길을 잃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찾아왔으니까. 어둠을 뚫고 나옴으로써 맞닥뜨린 환한 빛은, 그래서 더 반짝반짝 눈이 부셨다.
개인과 개인을 넘어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관객들에게 경고와 더불어 날카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연극 <킬롤로지>의 진면목을 비로소 실감하게 돼 인상적이었던 하루 역시도 바로 이날이었다. 초연과 재연을 통틀어 가장 감명깊게 관람했던 시간이라 머리 속에 여전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CAST]
알란 : 김수현
폴 : 이율
데이비 : 이주승
김수현 배우의 알란, 이율 배우의 폴, 이주승 배우의 데이비로 이루어진 캐스트는 재연 속 초연 페어로 유명하다. 나도 초연을 보긴 했지만, 이 페어로는 만나지 못해 궁금했는데 드디어 호기심을 해결할 수 있어 즐거웠다.
일부러 체중 감량을 한 건지, 저절로 살이 빠진 건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 비해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 두드러졌던 수현 알란의 감정은 아들을 잃고 게임 개발자에 대한 복수로 불타오르는 아버지의 절절한 분노를 온몸으로 보여주며 시선을 잡아끌었다. 한편으로는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마음이 들긴 했지만 이미 늦어버린 마당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율폴은 다시 봐도 정말 완벽한 폴 톰슨이었다. 별을 보러 갔던 날을 회상하며 어린 폴리의 두 볼을 감싼 아버지의 커다란 손을 자신의 얼굴로 그대로 가져와 찌부시키며 하나의 표정 안에서 희로애락 전부를 경험하게 해줘서 깜짝 놀랐다. 에단의 입양과 파양을 통해 마주한 희망과 절망의 교차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상처가 많은 아이가 자라나서 만든 게임의 양면성과 현실은 처절함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와중에 말을 정말 맛깔나게 잘해서 아무 생각 없이 듣다가 빠져들 뻔 했다. 하지만 기득권에 대한 이야기 만큼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일만 했다. 다양한 예를 들어줬는데, 생각나는 건 여성참정권 뿐이다. 여성 참정권이 생겨났다고 해서 세상이 망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반대했던 기득권층을 예로 들어 자신의 주장을 막힘없이 펼쳐나가던 폴의 카리스마는 대단하기 그지 없었다.
주승 데이비는 소년이라기보단 모든 것에 달관한 애어른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기며 독백을 선사했는데, 지금까지 봐온 데이비들과는 전혀 달라서 신선했다. 아빠 없이 엄마의 무관심 속에서 자란 아이가 내보일 수 있는 해탈의 경지가 극도에 달한 상태로, 속으로는 오만가지 감정이 요동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 무덤덤함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대사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건 괜찮았다. 다만, 약간의 속도 조절과 더불어 딕션에는 조금 더 신경을 써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가끔씩 대사를 빠르게 칠 때 발음이 뭉개져서, 이 점만 보완해 준다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러한 단점은 어마어마한 장점으로 커버가 돼서 사실 보는 내내 그리 중요치 않았다. 순간적으로 감정을 몰입할 때 쏟아져 나오던 에너지가 엄청나서 감탄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오히려 입이 쩍 벌어졌다. 특히, 메이시가 얽힌 마음 아픈 에피소드를 얘기하던 장면은 정말 최고였다. 다른 캐릭터의 독백이 마무리되고 나서(아마도 폴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확실친 않다), 주승 데이비만을 위한 조명이 비춰지자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지며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선명히 보였는데 그 순간, 내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연극 <킬롤로지> 보면서 한 번도 운 적이 없는데 이날은 예외였다. 그 정도로 마음을 뒤흔들었던 주승 데이비였기에, 못 잊을 것 같다.
하나 더! 폴이 어린 폴리와 아버지의 행복했던 과거를 늘어놓을 때, 의자에 앉은 채 폴리의 눈이 올려다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향하던 주승 데이비의 표정도 압권이었다. 별로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소 짓던 폴리와 달리, 슬픔으로 가득한 데이비의 눈빛이 그곳에 있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이건 주승 데이비만의 디테일이라고 생각되는데, 예상치 못한 장면에서 나만의 킬링 포인트를 발견하게 돼 매우 만족스러웠다.
반면, 잔혹한 영상의 실체가 공연장을 가득 퍼질 때, 기둥 구석에서 고통스러워하며 귀를 막고 몸을 구부린 채로 절규하던 주승 데이비의 모습도 눈물겨웠다.
폭력적이며 끔찍함이 난무하는 게임으로 인해 아들이 희생당했다고 여기는 알란과 게임과 범죄의 상관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던 폴의 신념이 무너지며 겪게 되는 변화, 데이비의 혼란스러웠던 인생과 그후의 이야기를 1막과 2막을 통해 머리 속에서 퍼즐을 맞춰나가듯 완성해 나가다 보니 어느새 공연은 끝이 났고, 마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사회적 이슈를 중심으로 크게 생각해 볼 거리가 존재함과 동시에 개인과 개인 중에서도 특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 돌아보게 만들어줬던 연극 <킬롤로지>였다. 결론적으로 개인과 사회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에, 균형을 잡고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 보게 되었다.
독백의 내용에 따라 조명의 색깔이 달라지는 점도 눈여겨 볼만 했는데, 알란이 데이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무대 위에 퍼지던 은은한 노란 빛의 조명 외에는 기억이 안 난다. 음악과 조명을 잘 쓰는 공연이라는 점은 또 봐도 여전해서 좋았다. 그치만 1막과 2막 사이의 인터미션은 아무리 생각해도 애매한 감이 없지 않다. 1막이 75분, 인터미션이 15분인데, 2막이 35분 밖에 안 돼서 더더욱.
그래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쫀쫀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들로 인해 무대에 시선을 고정하며 지켜볼 수 있었다. 초연 페어는 눈물 페어로 불러도 되겠더라. 셋 다 잘 울고, 관객까지 울릴 줄 알아서.
연극 <킬롤로지>를 다른 어느 때보다 제대로 마주하게 해준 공연이었어서, 처음으로 기립박수를 보낸 날이기도 했다. 배우들의 디테일은 서서히 흐릿해지고 있지만, 이날 공연장에서 경험했던 공기는 오래도록 마음 한 켠에 남아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몇 번 더 보면 대사까지 콕 박힐 듯 한데, 레전의 순간을 간직하고픈 마음이 더 커서 재연 또한 자둘자막의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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