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더 헬멧 룸서울 스몰룸 ::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

연극 <더 헬멧> 룸서울 스몰룸은 설 연휴 할인으로, 조금 저렴하게 예매할 수 있었다. 빅룸에 비해 좌석 수가 많지 않아 전석 매진이 된 상태였기에 수시로 예매창을 들락거려야 했지만,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게 해줘 행운이었다. 어느 순간 딱 한 자리가 눈에 보였는데, 그 자리가 내 자리였던 것!



1987년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당시, 백골단에게 쫓기던 학생 둘이 서점 지하의 작은 방에 숨게 됨으로써 펼쳐지는 이야기는 전투조로 처음 만난 선후배의 엇갈린 운명을 통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꿈꾸도록 도왔다. 


시간이 흘러 찾아 온 1991년, 선배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후배는 전투조에서의 계속되는 활약에 힘입어 일명 미친 개로 불리며 존재감을 뽐낸다. 그렇게 선배가 된 미친 개는 삼각건을 목에 두른 후배를 구하려다 백골단의 아지트에 갇히게 되고, 이로써 4년 전에 숨어들었던 공간과 조우하며 감춰진 진실을 파헤침에 따라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빅룸을 보는 내내 궁금했던 스몰룸의 서사를 마주하니, 완전한 룸서울의 이야기가 머리 속에서 드디어 완성되었다. 좁은 공간에 숨어있는 시간 동안 두려움에 떠는 겁 많은 후배를 위해 선배가 해준 떡볶이 이야기가 감명깊었고, 벽에 쓰여진 시가 4년 후에도 연결고리로 작용함에 따라 스몰룸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의미를 확인하게 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떡볶이 선배와 합기도 하얀 띠 후배의 서글픈 현실은 4년 후, 합기도 검은 띠의 미친 개 선배와 삼각건 후배에게로 이어졌는데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투쟁하는 이들을 만나게 돼 마음이 아팠다. 동지가 아닌 적으로 맞닥뜨릴 수 밖에 없었던 거라 더더욱. 


커피를 끝내주게 잘 탄다는 이유로 프락치 의심을 받다 결국은 스스로 인정하며 원치 않았지만 그것이야말로 경찰이 되어 가장 많이 해온 일임을 털어놓던 여경의 험난한 인생살이와 운동권임에도 여자는 문선에 동원되는 일이 많다고 불만을 쏟아내던 4년 전의 미친 개는 슬프지만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의 연대의식을 잘 보여주며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와 함께, 빅룸에서 에이리언2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편견을 쏟아내는 백골단을 향해 조목조목 반박하던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본인도 여자이면서 프락치가 여자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는 미친 개의 발언은 강렬하게 심장을 관통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는 여배우가 열연하는 떡볶이 선배도 꼭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 인해 탄생될 떡볶이 선배, 미친 개(라고 쓰고 시고니 선배라고 읽는다), 프락치의 미묘한 연대감과 울분의 순간이 전하는 희로애락의 절정은 상상만으로도 전율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스몰룸과 빅룸의 경계에 자리잡은 문은 불투명한 유리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연이 진행되면서 투명해졌다가 불투명해지기를 반복함으로써 극적인 묘미가 더해져 긴장감이 팽배해지기에 이르렀다. 전기신호에 따른 변화라고 하는데 굉장히 신기했고, 반대편에 자리잡은 백골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니 두려움이 앞섰다. 


나중에는 결국, 두 공간을 나누었던 문이 열리고 이로 인하여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스펙타클한 액션씬이 펼쳐져 통쾌함을 전했다. 그후에 들려오는 시고니 선배의 포효 또한 후련함을 남겼는데, 이 장면은 빅룸에서 관람해야만 정면으로 얼굴 표정을 만나는 것이 가능하니 이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하겠다. 결론적으로, 스몰룸만 봐서도 안 된다는 점! 


민주화운동에서 언급되지 않은 여성의 역할과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어 좋았다. 시대가 계속해서 변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는 주체적인 여성 중심의 서사를 더 많이 만나보게 될 것으로 기대됐음은 물론이다. 배우들의 열연과 대사의 의미 뿐만 아니라 음악의 활용도 또한 뛰어나서 눈물과 콧물의 콜라보레이션이 이루어져 얼굴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연극 <더 헬멧> 룸서울 스몰룸을 보게 돼 다행이라는 마음 뿐이었다. 


덧붙여, 스몰룸에서도 빅룸의 대화 내용이 들려왔는데 전혀 소음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재밌었다. 오히려 압박감이 증폭되는 상황으로 말미암아 사실감이 더해져서 소름이 끼쳤다.  



[CAST]

HELMET A : 김종태

HELMET B : 김보정

HELMET C : 한송희

HELMET D : 이호영

HELMET E : 강정우


스몰룸은 선후배 둘에게 초점을 맞춘 관계로, 빅룸에 존재했던 백골단 멤버들의 모습은 유리벽이 사라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1987년의 시간 속에서 떡볶이 선배를 가운데에 두고 스몰룸 곳곳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는 헬멧A의 눈빛이 정말 무섭다 못해 매서워서 마른 침을 꼴깍 삼키는 것마저 쉽지 않았다. 이러한 공포감이 1991년 프락치를 향해 "커피 한 잔!"을 외치는 찰나에 분노로 바뀌게 되긴 했지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김종태 배우의 연기가 다채로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빅룸에서 먼저 만난 양승리 배우의 헬멧A는 피지컬적인 압박감이 도드라졌던 반면, 이날의 헬멧A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담긴 포스가 압도적이라 두려웠다. 


연극 <더 헬멧> 룸서울 스몰룸은 헬멧B를 중심으로 극의 강점을 드러낸 작품이었다. 어리숙한 전투조 신입에서 미친 개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차올랐는데, 클라이막스에서 접하게 된 액션과 더불어 결말에 다다라 만나볼 수 있었던, 속을 뻥 뚫어주는 시원한 외침까지 완벽함 그 자체였다. 작은 방에 갇히게 됨에 따라 엿볼 수 있었던 프락치와의 대립을 통한 액션 또한 마찬가지. 김보정 배우의 시고니 선배를 한 번 밖에 못 본다는 것이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이제 내 자리 없어......그래도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에 맞춰 이뤄지던 액션씬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거다. 


빅룸에서 서점 주인으로 노련함을 선보였던 한송희 배우가 스몰룸에선 프락치로 탈바꿈하면서 애증을 동시에 경험하게 해주었는데, 이로 인해 달라진 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캐릭터의 온도차가 확연히 다른 헬멧C에게서도 역시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특히, 프락치로 활동해야 했던 속사정을 듣게 되니 피가 거꾸로 솟지 않기란 힘든 일이었다. 1987년에서도, 1991년에서도, 두 시대를 오고 가는 내내 애잔함이 가득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호영 배우의 헬멧D는 스몰룸에서 비중을 많이 차지하지 않아서 이야기할 부분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어서 남겨본다. The Turtles의 'Happy Together'에 맞춰 춤을 추면서 이게 신나냐고 중얼거리던 장면이 묘한 여운을 감돌게 하는 것이 뜻깊게 여겨졌다. 


강정우 배우의 헬멧E는 전투조 후배는 물론이고 객석에까지 떡볶이 선배로 감동을 전하며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사투리 소화도 잘했고, 후배를 지켜주며 들려주는 모든 얘기가 와닿아서 짠했다. 4년이 지나고 나서야 같은 장소로 돌아와 펜을 집어들었을 때, 미친 개가 되어 "시고니 위버!"를 멋지게 외치쳤을 때, 앞으로의 다짐을 소리높여 부르짖을 때, 그 모든 순간에 떡볶이 선배의 진심을 이어받은 이가 존재함을 깨닫게 돼 마음이 뭉클했다. 



떡볶이 선배가 있었기에 지금의 시고니 선배를 만나는 게 가능했다. 학생은 학생답게, 경찰은 경찰답게. 그렇게 자신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대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들로 인하여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이 사랍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신념대로 자신의 길을 갔던 이들의 시간을 들여다 보게 돼 감동적이었던 연극 <더 헬멧> 룸서울 스몰룸과의 한때였다. 자첫자막이 되어버렸지만 후회없이 즐기며 몰입했던 70분이었기에, 기립박수와 함께 보내줄 수 있었으므로 홀가분한 기분으로 공연장을 나왔다. 커튼콜에서 5명의 배우가 동그랗게 모여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장면도 훈훈하기 그지 없었다. 


참고로, 연극 <더 헬멧> 룸서울의 두 공간을 모두 본다는 가정 하에서 내가 권하는 공연 관람 순서는 '빅룸 -> 스몰룸'이 되겠다. 전체적인 내용을 인지하고 난 뒤에 디테일적인 요소를 파악하니 훨씬 더 와닿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순서가 반대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 일단은 자리부터 잡는 게 우선이니까.



공연 한 편으로 완벽한 극을 좋아하지만, 연극 <더 헬멧> 룸서울은 두 편을 봐야 함에도 관람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빅룸만 보고 스몰룸 공연을 예매하지 못하는 관객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이에 대한 해결책은 필요치 않을까 싶다. 무조건 두 편 다 만나봐야 한다. 스몰룸이 좀 더 취향에 맞았지만 빅룸을 안 봤더라면 후회했을 거다. 


룸알레포도 궁금은 한데, 역시나 빅룸과 스몰룸을 전부 다 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안 들어서 패스. 삼연이 온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일단은, 룸서울을 전부 다 본 것으로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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