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호프 -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 건네는 빛나는 위로

전쟁의 비극으로 점철된 시대 속에서 살아남은 78세 노인 호프와 그녀가 손에서 놓지 않는 원고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뮤지컬 <호프 -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은 녹록치 않은 삶 속에서 마주하게 된 작은 희망을 통해 빛나는 위로를 건네며 감동을 자아내는 작품이었다. 



카프카의 유작 반환 소송 실화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픽션을 가미함으로써 흥미진진한 공연의 묘미를 즐기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타이틀롤인 78세 노인으로 분한 김선영, 차지연 배우를 포함한 출연진의 호연과 넘버의 중독성, 무대의 활용 등이 돋보여 극에 대한 몰입을 높였다.


한 번도 읽히지 않은 책으로 노파의 곁에 자리잡은 원고와 스스로를 들여다 본 적이 없음으로 인해 곁에 둔 원고처럼 자기 자신에게 방치된 채 읽히지 않은 인생을 살게 된 호프의 생애가 둘의 만남이 비롯된 과거로부터 30년이 넘도록 진행 중인 법정 소송의 현장을 오고 가는 동안 극적으로 펼쳐지며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고조시켰다.  


앞서 언급한 소재 이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 포로 수용소, 홀로코스트 등의 안타까운 역사가 공연에 담겨 있어 과거의 시간들을 한 번 더 되돌아보게 됐다. 



[CAST]

호프 : 차지연

K : 고훈정

마리 : 유리아

과거 호프 : 이예은

베르트 : 송용진

카델 : 양지원


호프 역의 차지연 배우는 겉으로는 괴팍하고 고집 센 노파의 전형으로 보였을지언정, 여린 속내와 아픔을 지닌 인물의 깊은 심리가 곳곳에서 드러났기에 이로 인한 입체적인 열연이 돋보였다. 미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에 개의치 않으며 거침없는 욕설과 호탕한 침뱉기를 시전했을 때와 과거 호프와 카델이 신나게 춤을 추는 장면에서 둘의 동작을 따라하며 미소짓던 모습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극 안에서의 비중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결국은 호프의 얘기였으므로 이로 인한 존재감과 후반부에 확인할 수 있었던 넘버의 압도감이 엄청나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원고가 의인화됨에 따라 K로 명명된 캐릭터가 무대에 등장해 호프와 거의 모든 순간을 함께 했는데, 이로 인한 재미가 상당했다. 고훈정 배우의 K는 호프에게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 줄 아는 통찰력이 두드려져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넘버 소화할 때 느껴지던 홀리함과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전하는 온기도 대단했다. 


마리 역의 유리아 배우와 베르트 역의 송용진 배우도 공연에 감칠맛을 더하며 작품의 매력을 한층 더 상승시켰다. 사랑하는 베르트를 위해 원고에 집착해야만 했던 마리의 절절한 마음이 안쓰러웠고, 베르트의 이면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땐 분노가 앞을 가렸다. 그렇게, 배우들의 찰진 연기로 인해 가져야했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남달랐던 것이 사실이다. 


과거 호프 역의 이예은 배우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눈에 띄던 목소리 톤과 성격의 변화 등이 다채로워 절로 시선이 갔다. 귀여운 아이에서 독기 품은 일흔 여덟로 향해가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은 호프의 여정을 잘 보여줬다. 


카델 역의 양지원 배우는 사람 좋은 미소 뒤에 숨겨둔 비열함이 표출됐을 때의 연기가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와 함께 호프에게 내가 틀린 게 아니라 틀린 세상에 내가 태어났음을 피력하는 대사가 귀를 사로잡았다. 자기 합리화를 위한 변명임과 동시에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위안의 말이기도 했던 한 마디가 그런 의미에서 머리 속을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앙상블로 활약한 임하람, 정재현, 김수민, 하도빈 배우들도 좋았다. 사람은 물론이고 사물까지도 찰떡처럼 소화해내서 최고였다.



창작가무극을 연상시키는 안무가 넘버와 잘 어우러진 장면도 여운이 남았다. 빛보다 어둠에 더 가까운 찰나를 맞닥뜨린 호프의 절망이 힘 없는 움직임 속에서 더욱 처절하게 비춰지는 것이 가혹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만나 본 알앤디웍스의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꽤나 달라서 놀라웠고, 이와 더불어 굉장히 공들인 작품이라는 걸 일깨워줘 흥미로웠던 뮤지컬 <호프 -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었다. 자기 자신을 읽히지 않은 책처럼 내버려 두지 말라는 위로가 반짝임을 선사하는 공연이었기에, 그래서 더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


공연 관람하면서 실컷 운 데다가 한 번 보고 나서 금방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 게 오랜만이었어서 3월부터 연강홀에서 시작될 뮤지컬 <호프>도 예매를 해뒀다.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커튼콜에서 매우 신난 지원 카델과 예은 과거 호프. 뮤지컬 <호프>의 커튼콜 조명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밝았고, 기립으로 인해 사진의 초점과 방향은 갈 곳을 잃어 제대로 남긴 것이 몇장 안 되지만 그래도 잊지 않겠다는 차원에서 올려본다. 



고훈정 배우의 K는 의상부터 누가 봐도 원고지, 그래서 훈고지.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노래하는 거 간만에 보는 건데 정말 좋았다. 노래 부르는 훈고지 최고! 


커튼콜에서도 여전히 감정이 이어지는 모습에 괜히 더 울컥했다. 




그리고, 차호프. 차호프는 뭐 다른 설명이 필요할까 싶다. 더데빌에서 만난 차블엑은 온데간데 없고, 날선 원고 집착쟁이 78세 노인만 무대 위에 있더라.


연기도, 노래도 완벽해서 끊임없이 박수를 보냈다. 



이 장면, 호프와 케이가 포옹을 하는데 마리와 과거 호프가 그런 둘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어서 그 순간의 훈훈함이 마음을 따뜻하게 녹였다.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만의 인생을 써내려가기로 결심한 호프를 향해 다정한 응원을 보내는 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눈에 쏙 들어왔다.   



뮤지컬 <호프>의 넘버가 '빛나잖아'에서 '빛날거야 에바 호프'로 이어지는 것도, 그리하여 이미 빛나고 있는 에바 호프의 진정한 삶을 마주하게 된 시간이 눈부셨다. 


'빛나잖아'의 주체는 사실 원고였고, 그걸 보는 베르트 눈의 반짝임이 마리에게 원고가 닿을 수 있게 도왔는데 이를 통해 결국은 무한하게 빛나는 존재가 인간임을 확인시켜 주는 점도 만족스러웠다. 




차호프와 훈고지의 화기애애한 투샷을 보니, 재밌게 봤던 그날의 공연이 떠오른다. 이때가 아니면 요 캐스트로 못 볼 것 같아서 잡았는데,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한 배우들이 연강홀 무대에도 그대로 오른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더 기뻤다. 전캐스트가 그대로 다시 공연하는 걸 보는 게 쉽지는 않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을 때 봐두려고 한다. 






커튼콜 마지막에 이뤄지던 포토타임도 재밌었는데, 이것 뿐이라 살짝 아쉽지만 누가 어떤 포즈로 서 있는진 보이니까 됐다. 자세히 보면 표정도 보이고......그렇다.



무대도 참 예뻤던 뮤지컬 <호프>였다. 참고로 이날은 시작 전에 조명 문제가 발생해서 공연의 막이 조금 늦게 열렸는데, 커튼콜 이후에 제작진이 나와서 사과의 말과 더불어 초대권을 주셔서 감동이었다. 신속한 대처로 인한 호감도 상승! 



2층에서 전체적인 무대를 지켜볼 수 있어 즐거웠지만, 다음에는 1층에서 배우들의 표정을 포함한 디테일을 가까이서 만날 예정이라 기대가 된다. 그러니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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