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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제이미 :: 소년의 아름다운 성장기(신주협, 김선영, 윤희석)

초록별 2020. 7. 14. 02:30

2020년 7월,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서 뮤지컬 <제이미> 한국 초연이 드디어 시작됐다. 이 작품은 2011년 영국 BBC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Jamie: Drag Queen at 16> 속 실화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공연으로, 드랙퀸을 꿈꾸는 17세 소년 제이미가 세상의 편견을 뛰어넘으며 꿈을 향해 나아가는 따뜻하고도 당찬 성장 스토리를 담아낸 것이 특징이었다.


진로교육과 관련된 수업 시간, 헷지 선생님이 졸업을 앞둔 반 학생들에게 장래희망에 대해 물으면서 공연의 막이 오른다. 적성검사 결과는 제이미에게 포크레인 기사 아니면 광부가 직업으로 잘 어울린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소년은 이에 굴하지 않고 드랙퀸이 되기 위하여 힘차게 앞으로 나아간다. 



뮤지컬 <제이미>는 17세 소년이 마음에 간직한 꿈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 나가는 여정 속에서 힘겨운 고난의 과정을 거쳐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를 귀에 쏙 들어오는 팝 음악,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퍼포먼스와 함께 선보이며 짜릿한 감동을 선사했다.



제이미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언제나 자신을 지지해주는 엄마 마가렛과 이모 레이, 같은 반 친구 프리티가 존재함에 따라 외롭지 않았다. 교실에서 딘의 혐오를 마주하게 될 때마다 당당히 맞서는 게 가능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엄마와 헤어진 뒤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아빠가 보고 싶어 몰래 찾아갔다가 경험하게 된 차가운 시선과 냉정한 말투에는 결국 상처를 받고야 만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설의 드랙퀸 로코 샤넬과 멘토 휴고의 도움으로 새롭게 발견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잃지 않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해 잠시 멈춰섰던 길 위로 빨간 하이힐을 신은 채 또각거리며 한 걸음씩 천천히 전진해 나가는 제이미의 뒷모습이 머리 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소년의 아름다운 성장기를 확인하도록 도와준 뮤지컬 <제이미>는 경쾌하고 발랄한 이야기 속에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시대의 현주소를 일깨우며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었다. 전 세계 어디에나 존재했지만 최근 들어 사회적으로 급격히 두드러지게 된 문제와 현상을 직시하게 도움으로써 소수자와 소외된 자들을 위로하는 온기 가득한 공연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와 함께, 교실 안에서 히잡을 쓴 무슬림을 포함해 다양한 인종을 만나볼 수 있는 점도 신선했다. 다만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에 비해 공연 속 캐릭터 자체는 대부분 평면적이라서 그로 인한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제이미의 아빠, 딘, 헷지 선생이 갈등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긴 했으나 팽팽한 대립을 이뤄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쇼뮤지컬로 적당히 가볍게 즐기기 괜찮았다. 사회적 약자를 보듬으며 용기를 전달하는 극이었으므로 마냥 가벼운 건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얕은 서사를 중심으로 스토리 전개가 펼쳐졌음을 인정하지 않기도 힘들었다. 허나 실화의 힘 또한 어마어마했으므로, 이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내게 됐던 것 또한 사실이다. 



[CAST]

제이미 뉴 : 신주협

마가렛 뉴 : 김선영

휴고&로코 샤넬 : 윤희석

레이 : 정영아 / 헷지 선생 : 김지민 

프리티 : 문은수 / 딘 : 조은솔

트레이 : 유장훈 / 라이카 : 이원 / 산드라 : 송창근

사이드 : 최원섭 / 리바이 : 정창민 / 미키 : 장형민 / 싸이 : 이경윤

벡스 : 이유리 / 파티마 : 박선영 / 베카 : 김동연 / 비키 : 이재희

스윙 : 박선정, 이로운, 강경현


게다가 출연진 모두의 환상적인 열연은 앞서 언급한 단점을 잊게 만들어 주었으니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제이미의 학급 친구들인 비키, 베카, 파티마, 벡스, 싸이, 미키, 리바이, 사이드를 맡은 배우들은 캐릭터에 따른 각자의 개성이 살아 숨쉬고 있었고, 로코 샤넬과 같이 드랙퀸으로 등장한 트레이, 라이카, 산드라 역시도 매력적이었다. 이중에서도 산드라 역의 송창근 1인 2역으로, 제이미 아빠일 땐 180도 다른 모습으로 무대에 나타나며 놀라운 반전을 만나게 해줘서 깜짝 놀랐다.


제이미를 괴롭히는 악역으로 존재감을 표출한 딘 역의 조은솔 배우는 목소리가 정말 좋아서 자꾸 듣고 싶어질 정도였다. 캐릭터 특성상 못된 말만 내뱉는 게 안타까울 만큼 꿀보이스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 함정이었다고나 할까? 덕분에 대사 칠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름과 동시에 목소리에 빠져들게 만들었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음에는 부디, 밉지 않은 역할로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프리티 역의 문은수 배우는 제이미의 절친임과 동시에 자신만의 가치관이 바로 서 있는 학급의 우등생으로 눈길을 잡아끌었다. 제이미의 꿈을 북돋아 주며 노래하는 'Spotlight'에서 영롱한 음색이 빛났고,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은 10대의 단면을 접하게 해준 인물이라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헷지 선생 역의 김지민 배우가 보여준 카리스마도 좋았고, 정영아 배우가 완성시킨 레이 이모의 시원시원한 성격과 털털함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넘버 소화력도 최고였다. 


그리고 윤희석 배우가 드랙퀸 옷가게 주인 휴고로 첫 등장했을 땐 제이미에게 굉장히 무뚝뚝하고 무미건조하게 말을 툭툭 던지는 장면이 이어졌는데, 그게 참 웃겼다. 반면에 로코 샤넬로 분했을 때의 우아함과 리더십은 기대 이상이라 깜짝 놀랐다. 의상부터 헤어 스타일, 메이크업까지 잘 어울려서 멋있었다. 1인 2역의 상반된 온도차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고, 제이미에게 큰 힘이 되어준 또 한 명의 어른이라는 점에서 보는 내내 미소가 지어졌다.



오직 아들을 향한 사랑과 희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김선영 배우의 마가렛 뉴는 'He Is My Boy'를 통해 극대화되며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다. 제이미를 위해서 했던 거짓말이 비수로 돌아오는 걸 받아들이는 모습은 특히나 마음 아팠다. 마가렛을 향해 잔인한 말을 쏟아내는 제이미를 보면서 아들 키워봤자 대들기만 하고 속도 모르는데 무슨 소용인가 싶다가도, 그래도 엄마인데 아이에게만은 비밀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와 고뇌에 휩싸이게 되는 순간이 상당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공연을 관람하는 동안에도 확실히 제이미와 마가렛 중 한 사람의 입장에만 서서 바라보게 되진 않았다만, 선영 마가렛의 절절함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날 만난 뮤지컬 <제이미>의 주인공 제이미 뉴는 신주협 배우의 활약을 통해 훨훨 날았다. 드랙퀸을 꿈꾸는 금발의 17세 소년의 넘치는 끼와 재능이 주협 제이미를 통해 무대로부터 객석으로 온전히 전해져 와서 황홀했다. 이렇게 몸놀림이 유려한 배우인 줄 미처 몰랐기에, 감탄을 거듭하게 된 시간이었음은 물론이다.


시시각각으로 이루어지는 무대 전환 속에서 분위기에 걸맞는 몸짓과 표정과 목소리로 시선을 압도하는 주협 제이미였다. 공연의 첫 곡으로 귀에 콕 박힌 'And You Don't Even Know It'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포스도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었다. 고음이 조금 아쉽긴 했는데, 그외에는 전부 만족스러웠다. 노래 실력도 많이 늘어서 앞으로의 무대가 더 기대될 정도였으니 말 다한 거 아닐까 싶다.


한국의 1대 제이미 넷 중에서 유일하게 뮤지컬 배우로 이름을 올린 이유를 증명시켜 준 인물이 주협 제이미라는 점도 의미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돌 출신 뮤지컬 배우 조권, 현직 아이돌인 아스트로 MJ, 뉴이스트 렌이 캐스팅된 이유 역시도 실감하게 해주는 작품이었어서 아직 접하지 못한 세 배우의 공연도 궁금해졌다. 실력파 아이돌의 뮤지컬 데뷔 공연으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주협 제이미가 뮤지컬 <제이미> 개막 전,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환자의 아들로 까메오 출연한 것을 눈치 챈 관객들의 대화가 공연 인터미션 속에서 들려와서 괜시리 뿌듯했다. 


배역에 걸맞는 상큼 발랄한 에너지가 도드라지던 주협 제이미의 밸런스 잘 잡힌 열연도 매우 잘 봤다. 기회가 된다면 재관람을 하고픈 마음이 가득한데, 현재 나와 있는 스케줄상 회차가 많지 않아서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이날 공연에선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엄마와 크게 다툰 제이미가 분을 못 이긴 채로 씩씩거리며 집 밖으로 나가는 장면에서 문이 한 번에 제대로 열리지 않아 퇴장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가난한 집안 사정상 문이 뻑뻑한 게 이해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원활한 공연 진행을 위해서 기름칠은 좀 해줘야 되겠다 싶었다. 


버퍼링이 덜 된 문이 아주 조금 말썽을 일으키긴 했지만, 덕택에 재밌는 장면을 볼 수 있어 즐거웠다. 10대 소년 답게 "완전소중~"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주협 제이미가 그야말로 완전 소중했던 뮤지컬 <제이미>였다. 완벽한 하이텐션 제이미에게 푹 빠졌던 하루였다.



제이미가 마가렛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빨간 하이힐도 쓰담슈즈라는 이름으로 LG아트센터 공연장 로비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공연 관람 후에 사진을 다시 보니 기분이 남달랐다. 


앞서 얘기한 넘버 외에 2막에서 들을 수 있었던 'Everybody's Taling About Jamie'도 흥겨움을 더했다. 인터미션 때 제이미 반 친구 몇 명이 일찍 나와서 교실에서 노는 모습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으며, 배우들 전부 다 춤도 잘 춰서 떼창과 어우러지는 칼군무의 묘미도 상상을 초월했다. 


10대 학생들 사이의 유행어가 반복돼서 다소 유치한 구석도 없지 않았으나 이것은 그 시절에만 즐겨쓸 수 있는 친구들만의 공통어인 데다가 나 역시도 한때 이와 같은 과정을 지나왔기에 입가에서 웃음이 슬쩍 비어져 나오기도 했음을 밝힌다.



한 가지 더 얘기해 보자면 1막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드랙퀸쇼가 아니라 의상을 갖춰입은 제이미의 뒷모습만 보여주는 것으로 그치는 점, 2막의 졸업파티에서 자신이 원하는 옷을 차려입고 입장하는 장면으로 마무리가 되는 점도 눈여겨 볼만 했다. 


드랙퀸으로 무대에 서는 것보다 제이미가 '나나나'라는 이름의 또다른 자아를 찾게 됐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고, 그 이후에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졸업파티장에 나타나 존재를 입증하며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는 내용을 깨닫게 하며 여운을 남기는 게 공연의 핵심임을 알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소년의 아름다운 성장 과정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라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공연에 이어지는 커튼콜도 생각보다 짧지만 신났다. 차례대로 1명씩 나와서 인사를 하며 연습해 둔 안무와 포즈를 선보일 때마다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였기에 입으로 소리를 내는 대신, 열렬한 박수갈채와 더불어 마음 속으로 있는 힘껏 환호성을 질러주었다. 



무대는 생각보다 좁게 써서 중앙 좌석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시야 방해는 감안해야 했다. 인형의 집을 연상시키는 직사각형의 생김새로 구성된 무대가 한가운데 설치되어 있는데, 양옆으로 폭이 넓은 편이 아니었다. 2층 구조로 이루어져 1층은 배우들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2층은 라이브 밴드가 차지해 음악의 완성도를 높였다. 


참고로 1층 3열 왼쪽 사이드석이 내 자리였는데, 통로에서 꽤 들어간 좌석이었어서 8인조 밴드 지휘와 피아노 연주를 겸하는 김문정 음악감독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슬펐다. 제이미와 프리티가 눈썹을 그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공간인 화장실도 오른쪽에 있었서, 안에서 투닥거리는 모습이 가려질 때가 많았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자리는 무조건 중블! LG아트센터 공연장은 2층, 3층도 사랑이자 과학이니 괜찮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오히려 1층 앞열이 단차가 별로다. 1열부터 2, 3열까지는 무단차이니 예매할 때 조심하기를 바란다. 뮤지컬 <제이미>는 무대가 높아서 그나마 가리는 것 없이 잘 보긴 했다.


아무쪼록, 이제 막 시작된 뮤지컬 <제이미>를 통해서 제이미가 전하는 긍정의 힘과 꿈의 나날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넘버 가사처럼, 어둠을 뚫고 비추는 SPOTLIGHT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