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오만과 편견 :: 이 공연은 그저, 완벽한 원작 소설의 축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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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오만과 편견>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원작으로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올해 초연된다는 점에서 호기심이 생겨 프리뷰 티켓을 예매해 공연장으로 달려갔는데,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이 보유한 원형무대의 특성을 잘 살린 공연을 만나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무대 위에 존재하는 2명의 배우가 성별과 연령은 물론이고 직업에 상관없이 작품 속 21명의 캐릭터를 전부 소화하며 개성 넘치는 연기를 선보이는 점이 감명깊었던 연극 <오만과 편견>이었다. 이로 인해 목소리와 표정, 몸짓의 변화는 물론이고 소품과 의상에 포인트를 줘서 배역을 넘나드는 모습이 감탄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무대에 등장한 여배우가 갖춰 입은 의상은 드레스였는데, 치마 한쪽을 옆으로 걷어내면 바지에 부츠를 착용한 스타일링이 드러남에 따라 남자 캐릭터를 소화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남배우의 경우에는 겉에 입은 롱코트의 단추를 여미지 않은 채로 나왔다가 여자 캐릭터가 될 땐 단추를 잠그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 절로 눈이 갔다.
이외에 미시즈 베넷은 손수건, 캐롤라인 빙리는 부채, 샬롯 루카스는 안경, 미스터 베넷은 파이프, 키티는 기침, 미스터 콜린스는 모자 등을 활용해 팔색조를 능가하는 열연을 선사하며 관심을 집중시켰다.
스토리 전개는 원작소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2인 21역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배우들에게 모든 포커스가 맞춰지는 작품이었는데, 이것이 연극 <오만과 편견>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남았다. 책 속에 담긴 지문을 배우들이 그대로 읽어주는 부분이 적지 않음으로 인해 낭독극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배우들은 해설자로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지만 공연의 흐름상 오히려 캐릭터를 향한 몰입을 방해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크게 와닿지 않았다.
대화하는 인물들의 모습과 내용을 통해 전해져 오는 감정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고 이해가 되는 부분은 조금 쳐내도 괜찮았을 것 같아 더 아쉬웠다. 대신에 책 한 권 분량의 대본을 거의 통째로 외워버렸을 거라고 짐작되는 배우들은 참 대단해 보였다.
[CAST]
A1 : 김지현
엘리자베스, 미시즈 베넷, 리디아, 미스터 빙리, 캐롤라인 빙리,
샬롯 루카스, 데니, 캐서린 남작부인, 미시즈 가드너
A2 : 이동하
다아시, 제인, 미스터 베넷, 키티, 미스터 콜린스,
위컴, 캐서린 남작부인, 윌리엄 루카스, 미스터 가드너, 하녀, 펨벌리의 하녀장
(외 메리, 앤 드 버그)
내가 본 캐스팅은 김지현, 이동하 배우의 공연날이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엄청난 시간을 경험하게 해줘서 만족스러웠다. 공연 중간중간 살짝 버벅이는 장면이 존재하긴 했지만 감안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만큼, 커튼콜을 통해 박수를 보냈다.
특히, 김지현 배우의 연기가 돋보였다. 안정적인 대사톤을 중심으로 여러 캐릭터들 사이에서 환상적인 완급 조절을 통하여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지현 배우의 미스터 빙리는 정말 멋졌다. 청혼하던 순간의 카리스마 역시도 완벽했는데, 객석 위치로 인해 뒷모습밖에 못 봤지만 그것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다섯 명의 딸을 경제력 있는 신랑감과 결혼시키는 것을 최종목표로 하는 극성스러운 어머니, 미시즈 베넷이 된 지현 배우의 속물근성으로 다져진 푼수 연기도 훌륭했다.
이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캐릭터는 엘리자베스(리지)로,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대를 형성하게 돕는 당당함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래간만에 마주한 이동하 배우도 다채로운 연기력과 달달한 목소리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이 캐릭터에서 저 캐릭터로 순식간에 바뀌어 나감에 따라 분주한 와중에 코트 안쪽에 넣어둔 미스터 베넷의 파이프가 무대 한쪽 바닥에 떨어졌는데, 한참을 찾다가 발견하게 됐을 때 먼지를 털어 입에 물더니 미시즈 베넷이 된 지현 배우의 애드립을 시작으로 둘의 티키타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재밌었다.
기품이 넘치던 제인, 빠른 속도의 콜록거림과 고음이 두드러졌던 키티, 얄밉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콜린스도 기억에 남았다.
동하 다아시는 냉소적이면서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초조함을 섬세하게 표현해내 좋았는데, 리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읊던 장면에서 실수가 꽤 있어서 조금 아쉬웠다. 대사 치는 속도가 빨라지다 보니 발음이 뭉개졌고, 외운 내용을 뱉어내기에만 급급한 찰나가 눈에 띄어서 안타까웠다.
깨발랄했던 리디아, 키티 자매의 투샷은 웃음을 전했고, 제인과 리지의 침착한 무드는 둘의 이야기게 귀기울이도록 도왔다. 이와 함께, 리지와 다아시가 각자의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멀어지다 점차 거리를 좁혀가며 사랑을 확인하게 하는 장면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작품의 주인공인 다아시와 리지의 존재감이 생각보다 덜했던 점은 의외였다. 짜릿한 속도감을 전해주는 배역 체인지 과정이 빠르게 이어지는 동안 모든 캐릭터가 전부 다 다르게 느껴져서 좋았던 반면, 극을 이끌어 간다고 볼 수 있는 두 남녀의 비중과 무게감이 너무나도 약하고 가벼워서 슬펐다.
차라리 캐릭터 개수를 줄이고 리지와 다아시의 이야기를 조금 더 깊이있게 다뤘다면 어땠을까 싶다. 여기에 불필요한 지문만 덜어냈어도 집중력이 확 올라갔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괜시리 서글픔이 밀려오기도 했다. 기나긴 러닝타임으로 인한 고단함도 해결이 됐을 테고 말이다.
원작에 너무나도 충실한 나머지 2인 21역 외에는 독창적인 부분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무대와 조명의 간결함이 관객의 시선을 배우들에게 확실히 고정되도록 해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덧붙여, 캐스팅보드 속 배우들이 맡은 캐릭터 외에 의외의 인물들이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이 또한 눈여겨 지켜봐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앉은 자리는 왼쪽 사이드 블록 S석으로 대부분의 장면이 잘 보이긴 했다. 하지만 미스터 빙리가 제인에게 청혼할 때의 빙리의 얼굴과 초상화의 표정은 만나볼 수 없었다.
무대를 골고루 쓰기는 하지만 객석의 위치마다 보이는 장면과 보이지 않는 장면에 차이가 나니, 고심해서 자리를 잡는 일이 필요해 보였다.
연극 <오만과 편견>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저, 완벽한 원작 소설의 축소판이었다. 이 정도로 차이가 없을 줄은 몰라서 당황스러울 만큼. 그치만 프리뷰 공연이라는 이유로 40% 할인과 함께 배우들의 명연기를 관람할 수 있었으니 후회는 하지 않을 예정이다.
공연 관람 전에 제인 오스틴의 원작 소설을 읽고 간다면 빠르게 변화하는 캐릭터들의 모습을 이해하기엔 쉬울 테지만 책을 눈으로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테고, 읽지 않고 간다면 캐릭터로 인한 혼란스러움을 경험할 가능성이 존재하나 신선한 작품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여지가 다분하니 선택은 본인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참고로 나는 원작을 미리 읽고 갔다.
초연답게 캐스팅이 마음에 들어서 극이 취향이면 몇 번 더 보려고 했으나 나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배우들만 보러 가기에는 러닝타임이 매우 길고 내용도 뻔해서 자첫자막으로 마무리한다.
그래도, 한 번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이야기를 만나보게 해준 2명의 배우들이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남은 공연 기간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