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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더데빌 :: 환상적인 조명 아래 빛나던 그 이름, 차지연

초록별 2019. 1. 26. 02:12

뮤지컬 <더데빌>은 카피 문구를 통해 '낯설고 불친절한 문제적 뮤지컬의 귀환'을 알리며 위풍당당하게 무대에 올랐다. 사실 초연부터 재연을 거쳐 현재 진행 중인 삼연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그래왔으므로, 앞선 문장을 맞닥뜨렸을 때 어색함 없이 수긍하며 이 공연의 존재 이유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는 점이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다만 그걸 알면서도 꾸준하게 이 작품을 관람해 왔으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가득한 공연이 뮤지컬 <더데빌>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며 매번 색다른 시간을 경험하도록 도왔던 만큼, 이번에 확인할 수 있었던 뮤지컬 <더데빌> 역시도 신선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초연 당시에 한 명의 배우가 열연했던 엑스가 재연부터 화이트 엑스와 블랙 엑스로 나뉘어짐에 따라 인간의 선택을 통하여 비롯되는 선과 악의 대립이 극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삼연은 또 달랐다. 신과 악마의 파워게임 안에서 희로애락을 반복하다 마침내, 진정한 생의 의미를 깨닫는 인간의 모습을 접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다만, 두 엑스에 보다 집중함으로써 존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존재감이 예전보다 희미해진 점은 아쉬움을 자아냈다. 예상치 못했던 장면들이 공포감을 조성했던 초연의 충격을 감소시키며 수정과 보완을 이루어낸 재연을 좋아했기에, 삼연 속 낯선 장면과의 조우가 마냥 만족스럽진 않았던 게 사실이다. 특히, 재연 에필로그 넘버가 삭제된 것이 정말 많이 슬펐다. 



괴랄함의 극치였으나 양면성을 드러내며 선악을 동시에 보여줬던 엑스의 카리스마는 초연이, 에필로그 넘버를 통해 인간과 인간이 지닌 영혼의 가치를 돌아보게 만들며 생의 아름다움을 전하던 작품의 메시지는 재연이, 화려한 조명과 젠더 프리 캐스팅의 좋은 예를 선보인 점에 있어선 삼연의 장점이 부각되던 뮤지컬 <더데빌>이었다. 


하지만 극이 계속 무대에 오를수록 설명적인 대사들이 많아져서 불친절함과 멀어지고 있다는 점은 묘하게도 아이러니를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친절한 건 맞는데 사족이 더해지니 루즈해질 수 밖에 없더라.



그래도 확실히, 배우들의 활약이 돋보임에 따라 단점을 잊을 수 있어 흡족했다. 4명의 주연 배우와 6명의 코러스에 라이브 밴드의 완벽한 결합이 락뮤지컬의 강렬한 사운드로 하나되며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던 순간들이 인상적이었다.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뮤지컬 <더데빌> 넘버의 변화가 느껴졌는데, 이 또한 익숙지 않은 낯설음을 선사하며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이와 함께 뮤지컬 <더데빌>은 시놉시스에 따른 스토리 전개를 기대하기보단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바로 그 순간에 느껴지는 현장감의 카타르시스가 극대화된 극이므로 궁금증이 생긴다면 일단 관람을 권한다. 



그리고 단언컨대, 이 공연의 최대 강점으로 손꼽을 수 있는 건 쉴새없이 무대를 수놓는 다채로운 빛의 향연이니 조명의 움직임에도 주목해야 함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겠다. 참고로, 조명의 활용은 2층 객석에서 바라보는 것이 진리다. 커튼콜 사진만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조명의 재미 속에서 종횡무진하던 화이트 엑스와 블랙 엑스, 존 파우스와 그레첸. 이들이 빛과 어둠 사이에서 맞이하게 된 결말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요동쳤다. 




두 엑스의 대화가 추가됨으로써 그들의 목소리가 새로이 귓가에 들려왔는데, 블랙 엑스의 도발에 화이트 엑스가 응하면서 펼쳐지던 존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시간들이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갖가지 유혹과 선택의 기로에 서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많이 닮아있어 공감이 절로 됐다.


덧붙여, 내가 본 날이 조형균 배우와 차지연 배우가 함께 무대에 서는 마지막날이라서 둘이 포옹하는 장면도 따뜻함을 더했다. 투샷이 훈훈하다 못해 뜨거웠다. 



하지만 다시 곱씹어 봐도, 배우들은 참 좋았다. 블랙 엑스 역 차지연 배우의 세미막이자 4명의 주연 배우가 함께 하는 페어막으로 삼연 자첫을 마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엔딩 후 곧바로 앵콜곡으로 넘어가지 않고 배우들의 무대인사를 만나볼 수 있는 부분이 생긴 건 처음 알게 돼서 살짝 어리둥절했지만, 덕분에 단체 사진을 찍게 돼 만족스러웠다.  



코러스로 분한 6명의 배우들이 선사한 매력도 공연 속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겨우 한 번의 관람이 전부라 개개인의 개성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훌륭했다.


게다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이 뮤지컬 <더데빌> 초연을 봤던 곳이라서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초연은 1층에서 관람했는데, 이날은 위메프로 예매한 덕택에 2층에서 조명의 멋스러움과 무대 전체를 내려다 보며 감상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존 파우스트 : 장지후


장지후 배우의 존 파우스트는 압도적인 피지컬이 눈에 들어오는 캐릭터였다. 이 작품으로 배우 자체를 처음 만나게 된 거였는데 담백한 창법과 무난한 연기가 평범한 인간 존재를 상기시키는 것이 의미있었다.


뉴욕 월 스트리트의 전도유망한 주식 브로커였으나 주가 대폭락 사태를 발발하게 만든 블랙 먼데이를 기점으로 선이 아닌 악의 손을 잡게 된 존 파우스트의 캐릭터 설정이 잘 맞아떨어지는 점 역시도 눈여겨 볼만 했다. 




그레첸 : 이하나


이하나 배우의 그레첸은 과거의 재연에서도, 현재의 삼연에서도 여전히 최고였다. 강약 조절이 두드러진 넘버 소화력과 존 파우스트의 방황으로 인해 고통받는 존재의 괴로움을 온몸으로 표출시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이와 더불어 하나 그레첸이 열창하는 'Mad Gretchen(매드 그레첸)'은 명불허전임을 또다시 인정하게 됐다. 붉은 핏빛 조명 아래서 광기를 드러내던 그레첸의 포효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포스로 오감을 자극했다. 




신은 인간의 소리를 듣기를 원하며 언제든 귀기울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커튼콜에서도 몸소 보여주던 조형균 배우의 화엑, 사과를 손에 쥔 채로 계단을 내려가며 자신이 직접 유혹으로 이끌 존재를 물색하고자 발걸음을 옮기던 재빠른 행동력 대장 차지연 배우의 블엑은 사진 속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며 유쾌함을 건넸다. 



이로 인하여 빛은 실재하지 않는 존재, 어둠은 실재하는 존재로 명명되며 인간에게로 점점 가까워지는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이 곁에 머무름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종교적인 분위기가 새삼 강하게 전해지는 것이 호불호를 가르는 경계가 될 것으로 여겨졌다. 성경 구절이 더 많아져서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공연이 진행되던 도중엔 팽팽한 기싸움으로 긴장감을 전했던 둘이 커튼콜에선 이렇게나 다정하더라! 그리하여, 차블엑의 눈물을 닦아주던 쌀화엑의 모습도 명장면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화엑에게 꼬박꼬박 존대말을 사용하긴 하나 마음 한구석이 삐뚤어져버린 반항적인 소악마 기질이 엿보이는 블엑이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워 품에 안긴 찰나가 더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블랙 엑스(X-BLACK) : 차지연 


이날 관람한 뮤지컬 <더데빌>은 환상적인 조명 아래 빛나던 그 이름, 차지연이란 세 글자로 설명이 가능했던 시간이었음을 밝힌다. 지금껏 남배우들만이 맡았던 엑스 역할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젠더 프리 캐스팅의 성공적인 결과와 방향성을 제시했기에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것이 당연했다.


'Big Time(빅 타임)'에서 계단 난간에 다리를 걸치고 리듬을 타며 흥겨운 몸짓으로 음악에 몸을 맡김으로써 존 파우스트에게 선택받아 그를 지배하게 된 희열을 감추지 않고 표출하던 모습에서 박력이 느껴졌고, 'Possession(포제션)'에서 반복되는 라틴어 가사인 "Sanctus Domini Kyrie Eleison(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랩처럼 흥겨우면서도 리듬감 넘치게 읊조리던 순간에 풍겨져 나오던 짜릿함과 공포가 교차돼 상반된 감정을 맴돌게 하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이게 끝이 아닐 뿐더러 다양한 종류의 의상 또한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블랙 컬러의 정장을 갖춰 입었을 땐 제대로 된 수트핏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블랙 롱 드레스의 우아함을 영접하게 된 때에는 차블엑을 따라 어디라도 가지 못할 데가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존 파우스트와 화엑을 포함해 그레첸과의 케미마저도 퍼펙트했으니 더 이상의 불필요한 말은 삼가기로 한다. 막공 전에 차블엑을 볼 수 있어 정말로 영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신과 악마를 넘어서 인간과 그가 지닌 영혼의 존재 역시도 새로이 맞닥뜨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화이트 엑스(X-WHITE) : 조형균 


조형균 배우의 화엑은 재연을 뛰어넘는 성스러움으로 무장함으로써 빛을 향한 굳은 믿음을 심어주었다. 그레첸의 기도를 듣고 그것을 입에서 말로 내뱉으며 구원을 향한 손길을 뻗던 장면이 역시나 눈에 쏙 들어왔다.

공연의 엔딩을 담당하는 '피와 살'이 흘러나옴에 따라 모든 것을 포용하는 목소리의 울림이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 안심이 됐다. 시원한 가창력도 여전했고. 



무대 위의 모든 이들이 귀여웠던 사진 한 컷은 보너스! 조명도 열일 중, 라이브 밴드와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던 커튼콜의 시간이 어여뻤다. 






커튼콜의 하이라이트인 가위바위보는 꽤나 오랜 시간을 이어졌는데, 결국 차블엑 당첨! 이겼다고 신나하던 배우들과 졌다고 주저앉아버린 주인공의 모습이 전하는 온도차가 상당해서 재밌었다.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집중하던 관객들은 마냥 즐거울 뿐이었지만!







코 찡긋하고 일어나서 앵콜곡을 마무리하던 차블엑과 가위바위보는 이겼지만 마이크를 손에 쥐고 함께 열창에 임하던 하나 그레첸의 투샷은 행복한 에필로그를 연상시켜서 즐거움이 2배가 됐다.




그레첸이랑 블엑이랑 노래하는 사이에 화엑은 존 파우스트와 다정한 한때를 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공연과는 다른 화기애애한 커튼콜의 묘미는 웃음을 빵 터뜨렸다. 





차블엑의 멋짐이 폭발하던 마지막 이 장면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차블엑 최고! 이제 차블엑은 없고, 차화엑은 있어서 마저 보면 뮤지컬 <더데빌> 속 차지연 배우 캐릭터 관람 완성하는 건데, 과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레첸도 괜찮았지만, 블엑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기에 고민이 좀 된다. 



참고로 차블엑의 세미막은 2019년 1월 1일, 새해 첫날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올해 나의 첫 관극은 뮤지컬 <더데빌>이 되었다. 덕분에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배우들의 새해 인사까지 들을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결론적으로, 눈 앞의 선택을 두고 방황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깊이 공감할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자 귀에 꽂히는 명곡과 무대 위를 자유로이 비추는 형형색색의 조명에 반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공연이 바로 뮤지컬 <더데빌>이었다. 볼 때마다 만감의 교차를 실감하지만 그래도, 안 보고 넘어갈 수는 없는 극이기에 다음 관람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