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 어햎은 사랑이어라 (전성우,박지연,권동호)
언제 봐도 어햎은 사랑이어라. 초연과 앵콜 공연에 이어 재연으로 돌아온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관람하며 느꼈던 감정의 결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심장도 없으면서 따뜻함을 나눠주던 헬퍼봇들의 이야기에 미소와 눈물이 교차됨으로써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유일한 친구인 화분과 함께 자신이 머무르는 방만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었던 헬퍼봇5 올리버와 외롭고 지루한 일상이지만 씩씩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헬퍼봇6 클레어. 두 로봇의 우연한 만남이 방을 벗어나 밖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게 만들면서 펼쳐진 기상천외한 모험과 뜻밖의 삶은, 그들과 다를 바 없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전하며 공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사람을 돕도록 프로그래밍된 헬퍼봇들에게 있어 주인이 없는 혼자만의 인생은 오히려 더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이었을 거다. 몇몇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덧붙여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로봇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여기에 인간을 투영시킴에 따라 낡은 헬퍼봇이 모여사는 아파트의 시간을 통해 전성기가 지난 존재들의 여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도록 도왔다.
아기자기한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이것을 주축으로 뻗어나가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통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의 가치 또한 되새겨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또다른 방식으로 이 공연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도 뜻깊었다.
주인이었던 제임스를 친구로 여기며 만나러 가기 위해 돈을 모은다는 올리버의 계획을 듣게 된 클레어는 예전 주인들에 대한 슬픈 기억으로 말미암아 둘의 관계는 물론이고 그의 결심마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녔지만 결국에는 함께 제주도 여행을 떠나면서 변화를 꾀하게 된 둘의 모습을 바라보는 찰나 역시도 의미있게 여겨졌다.
계속 혼자였더라면 몰랐을 사랑의 설레움과 두려움을 통해 성장해 나가던 올리버와 클레어. 어쩌면 사랑이야말로, 사람들로부터 배우게 된 가장 커다란 선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올리버 말마따나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게 마련이지만 클레어와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은 오로지 둘만의 것으로 제임스와 경험하지 못했던 또다른 빛깔을 지니고 있었으니.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고 이미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는데, 재연으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만나게 되니 또다시 눈물이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덕분에 역시나 어햎은 어햎이구나 싶었다. 내가 좋아했던, 그리고 여전히 좋아하고 아끼는 창작뮤지컬의 귀환에 대한 반가움과 애정이 넘쳐 흐를 정도였다.
[CAST]
올리버 : 전성우
클레어 : 박지연
제임스 : 권동호
캐스팅이 발표된 후 기대감을 잔뜩 심어준 배우들과의 첫만남이 정말 즐거웠다. 성우 올리버의 귀여운 몸짓과 세밀함으로 가득한 연기가 심장을 두근거리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랜만에 뮤지컬 배우 전성우를 마주해서 그런지, 노래 실력도 그새 더 늘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아쉽게도 개그 포인트는 정말 못 살렸지만, 그래서 더 웃겼다는 것이 반전!
지연 클레어는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열연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역시나 넘버 소화력은 시원하다 못해 짱짱함 그 자체였고, 장난기 다분한 개구쟁이 캐릭터로 웃음을 전하는 모습도 취향에 꼭 맞아 떨어졌다. 매번 대극장 공연에서만 보다가 소극장에서 더 가까이 호흡할 수 있게 돼서 정말 좋았다. 뿐만 아니라 극 초반부터 오른쪽 팔이 고장날 거란 암시와 복선을 깔아두며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 디테일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마음은 아팠지만.
동호 제임스는 다정한 온기를 뿜어내며 올리버와 훈훈한 우정 케미를 선보였다. 배우 특유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주는 넘버 역시도 멋지게 잘 어울려서 절로 귀를 기울이게 됐다. 우편 배달부도 괜찮았고, 공연 속 무대의상 중 가장 별로라고 생각한 모텔 직원 스타일마저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던 장면도 볼만 했다.
동호 제임스는 피지컬적으론 듬직한 면모가 돋보였지만, 이와 달리 내면에는 섬세하고도 여린 감성이 자리잡고 있을거란 추측이 어렵지 않았고 은근하게 이러한 생각이 맞아 떨어지는 모습들이 포착돼 호기심을 자아내는 인물이기도 했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주인으로, 정말로 올리버의 친구로 곁에 존재했을 거란 상상이 가능했다고나 할까? 지금까지 만나 본 제임스들 중에선 가장 어린 나이대에 속할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같은 배역을 맡은 배우들 중에선 실제로 가장 어리기도 하구나. 신기하다!
지연 클레어와 성우 올리버는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이었다. 어쩜 그리도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올리버가 보유하지 못한 개그감은 대신에 클레어를 통해 빛났으니, 그거면 됐다 싶었다.
특히, 성우 올리버의 연기에 지연 클레어의 노래가 더해지니 이거야말로 환상의 커플이었다. 두 배우의 각기 다른 강점이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마주하게 돼서 더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얼굴 크기 만큼은 둘 다 작아서,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고 한다.
올리버가 클레어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줬을 때의 따스함, 충전기 왈츠에서 보여지던 올리버를 향한 클레어의 천진난만함이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지연 클레어의 치마 자락을 바라보던 성우 올리버가 밖으로 삐져나온 부분을 손으로 살랑살랑 만지작거리면서 미소 지은 채로 장난을 치고 있던 장면도. 잠시 후에 냉장고에서 나온 지연 클레어 역시도 자신의 치마 자락을 웃으면서 팔랑거리던 순간도.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이어지던 장면 속에서 만날 수 있었던 지연 클레어만의 시간, 이때의 단독샷은 다시 봐도 정말 심쿵! 분위기도 최고였다. 이와 함께 재연에서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자마자 이번 어햎 속 최애 클레어로 등극한 지연 클레어는 내 마음 속에 저장+_+)b
솔직히 관람 전엔 클레어 의상 컬러가 은은한 톤에서 화사한 톤으로 바뀌어서 실망할까봐 걱정했는데, 배우들이 알아서 맞춤옷처럼 소화를 잘 해내고 있었기에 이로 인한 아쉬움은 없었다. 핑크와 민트의 조합이 전하는 눈부심이 나쁘지 않았다.
커튼콜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제임스와 올리버의 아름다운 한때도 웃음을 자아냈다. 성우 올리버가 맛있게 차 한잔을 마시는 걸 바라보며 티팟을 손에 쥐고 화분에게 차를 따라 주려던 동호 제임스.
둘이 마주보고 웃던 장면이 사진과 더불어 기억에도 깊이 남았다.
음악을 좋아하던 제임스. 말수가 적고 수줍은 많은, 포근한 미소를 지닌 주인의 모습을 닮은 동호 제임스가 올리버와 함께 했던 지난 날을 머리 속에 떠올릴 수 있어 흥미로웠다.
좋아하는 LP판을 차곡차곡 지연 클레어에게 안겨주던 성우 올리버. 자꾸 그러면 클레어 오른팔 고장나는데ㅠㅠㅋ 센스 만점 연기로 올리버가 LP판을 다시금 회수하게 만들었던 클레어였다.
공연 속에서 매우 완벽했던 둘의 케미는 커튼콜에서도 계속 진행됨에 따라 보는 내내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올리버와 클레어 옷 뒷부분에 자리잡은 네모 모양은 충전기를 연결시키는 부분이라고 생각됐는데, 헬퍼봇5와 헬퍼봇6의 차이점이 극명하게 표출돼서 재밌었다.
지연 클레어의 헤어 스타일도 자세히 보니까 훨씬 어여뻐서 마음에 쏙 들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소품들도 커튼콜 중간중간에 담아봤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은 부분이 눈에 많이 들어왔지만, 그래서 더 아날로그적이고 클래식한 면이 없지 않아서 두루두루 살펴보게 됐다.
여전히 빈티지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만, 미래라는 시대적 배경을 의식한 소품의 변화 또한 감지됐던 어햎 재연이었다. 그중에서도 무대의 일부분이 상승하며 보여지던 자동차 리프트는 귀여웠다. 피아노가 회전함에 따라 제임스가 연주하는 모습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된 점도 괜찮았다.
달라진 충전기 모양과 캐릭터 의상은 적응해 나가는 중이니 된 걸로.
예전과 다름없이 커튼콜 촬영이 가능해서 열심히 셔터를 누르며 그날의 공연에 대한 여운을 카메라에 담았다. 뉴캐스트로 신선함을 선사한 세 배우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박지연, 전성우, 권동호 배우 모두 자신만의 캐릭터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바라볼 수 있어 흐뭇했다. 어햎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치 못했던 캐스팅이기도 해서 기쁘기도 했고.
그러니까, 다음에 또 만나기로 해요!
동호 제임스를 따라하며 퇴장하는 순간까지도 즐거움을 전했던 성우 올리버와 지연 클레어였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스토리와 넘버의 기본기가 탄탄한 작품으로, 여기에 더해진 배우들의 열연이 시너지를 내는 공연이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꾸준히 무대에 오를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이전에 공연될 때 전석매진의 기염을 토했던 어햎은 재연이 찾아옴에 따라 공연장의 규모가 커져서 티켓값이 상승했다. 그것까진 괜찮은데 재관람 할인율이 30%에서 25%로 감소하고, 이제는 공연 티켓에도 재관람 도장을 크게 찍어줘서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들게 했다. 네오가 그리워졌던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시간이 흐를수록 할인율과 혜택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라 이러한 감정이 더 커질까봐 두렵다. 이건 어햎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모든 공연과 관련된 얘기지만 어햎에서 유독 크게 느껴졌기에 끄적여 본다.
게다가 커튼콜이 끝나자마자 사진 촬영을 제한해서 무대 전체의 모습을 제대로 담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예전엔 기다려줬는데 이제는 기대를 하지 말아야겠다. 공연은 좋았는데 부가적인 부분에서 안타까움을 경험해야 했던 어햎과의 시간이었다. 몇번 더 보긴 할테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마음의 준비는 해둬야겠다.
그래도, 어햎은 사랑이다. 사랑이 맞다. 근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주르륵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