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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지킬앤하이드 :: 선과 악을 둘러싼 인간의 무모한 도전, 그리고 조승우

초록별 2018. 11. 27. 23:47

뮤지컬 <지킬앤하이드>가 한국 초연을 시작한 것이 2004년이라고 한다. 10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작품인 만큼, 올해 공연 역시도 연이은 매진 행렬이 이어지는 게 그리 놀랍지 않았다. 


특히 선과 악을 넘나들며 지킬과 하이드의 1인 2역을 소화하게 될 세 배우가 발표되자마자 엄청난 존재감과 더불어 티켓팅에 대한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했으므로, 역대급 캐스팅이라는 말을 절로 인정하게 됐던 것이 사실이다. 




의사로의 사명감과 더불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불러 일으킨 위험한 실험은 결국, 선과 악을 분리해내는 것이 가능할 거라 믿었던 어리석은 인간의 무모한 도전으로 끝나 버렸지만 무대 위에서 확인하게 된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은 깨달음을 전했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선과 악에 대한 논쟁은 인류가 살아있는 한, 끝없이 계속될 것임을 모르지 않으므로 공연을 통해 색다르게 마주할 수 있는 시간 또한 흥미진진함을 선물하고도 남았다. 



샤롯데씨어터에서의 티켓 수령은 공연 2시간부터 가능했는데, 1시간 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붐비는 걸 보게 되니 새삼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의 인기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표소는 한산함 그 자체였으나 오페라 글라스를 대여받기 위한 줄이 길었고, 엠디는 품절된 게 많아서 한 번 쭉 훑어보고 말았다.


포토존 역시도 인산인해를 이뤘던 관계로, 이렇게나마 한 컷을 담고 공연장에 입장할 때까지 로비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기다렸다. 전석매진의 위엄을 샤롯데씨어터에 도착한 순간부터 경험할 수 있었던 하루이기도 했다. 



[CAST]

지킬 & 하이드 : 조승우

루시 : 해나

엠마 : 이정화


공연을 관람한 소감은, 한 마디로 배우 조승우의 저력을 다시금 증명해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그냥 배우가 아니라 뮤지컬 배우 조승우. 지킬과 하이드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사랑과 정의를 위해 희생하는 의사이자 악행을 일삼는 악마로의 이중인격을 완벽하게 표현함으로써 오감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무도 찬성하지 않는 실험에 자신의 신념과 생명을 걸고 온몸을 맡겨버린 지킬의 결단력에는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그 후, 원했던 결과가 아닌 비극으로 치닫게 됨으로써 지킬을 장악하게 된 하이드가 표출하는 어둠의 카리스마에는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에서 가장 유명한 넘버는 작품을 관람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익숙한 '지금 이 순간(This is the moment)'이지만, 이날의 공연에선 '얼라이브(Alive) 1, 2'를 통해 지킬이 하이드로 바뀌어 나가는 모습과 그로 인해 발생한 사건의 충격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해준 순간이 인상깊게 남았다. 


그리고 일명 댄져로 불리는 '나도 몰랐던 나(It's dangerous game)'에서의 하이드는 치명적이었고, 이 곡을 포함해 등장할 때마다 매 순간 엄청난 괴력과 압도감으로 무대를 휘감았다. 덧붙여 조지킬의 댄져는 그야말로 댄져하다는 입소문이 무성했는데, 직접 만나보니 역시나 그랬다.   


이와 함께 지킬과 하이드의 듀엣을 자랑하는 '대결(The confrontation)'은 역시나 최고였다. 지킬과 하이드가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각가의 캐릭터가 소화해야 하는 넘버의 소절마다 목소리 톤과 얼굴 표정은 물론이고 분위기까지 달라지던 컨프롱 속 조지킬의 모습은 완벽함 그 자체였다. 


연기와 노래, 그 어떤 것도 환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던 조지킬이었다. 안정적이면서도 힘 있게 부르는 넘버 소화력과 연기의 출중함이 그야말로 퍼펙트한 지킬과 하이드를 소환해 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짜릿했다. 



루시 역을 맡은 해나는 아이돌 그룹 마틸다의 멤버라고 하는데, 뮤지컬 배우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시원한 가창력이 소름을 돋게 만들 정도였다. 다만, 노래를 부를 때 돋보였던 절절한 감정이 연기를 할 땐 잘 드러나지 않고 아직은 어색한 부분이 두드러져서 이 점에 있어서는 시간이 좀 필요해 보였다. 몸도 잘 쓰는 걸로 미루어 보건대, 연기만 조금 더 좋아지면 될 듯 하다. 


이정화 배우의 엠마는 청초함과 당당함을 지닌 멋진 캐릭터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킬에 대한 단단한 사랑과 더불어 자신이 믿는 것을 밀고 나갈 줄 아는 굳은 심지가 깊은 감명을 자아냈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주조연 배우를 포함, 앙상블 배우까지 모두가 무대 위에서 빛을 발한 시간이기도 했음을 밝힌다. 루시와 엠마의 듀엣도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사실, 내가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를 관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공연의 초창기에 조지킬로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기억에 남은 것은 컨프롱이 전부였다.


이러한 이유로 중심 내용은 알지만 공연의 흐름 자체는 희미해진 상태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래서 무척이나 반가웠고, 역시나 조지킬은 조지킬이었음을 깨닫게 돼 흡족했다. 처음 봤을 때의 놀라움이나 감흥은 없었지만 훨씬 더 능숙하게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뮤지컬 배우 조승우의 가치는 입증된 셈이니까.


공연 중간중간 장면에 어울리는 양념을 곁들여 긴장을 풀고 또 조이는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막다른 길에 다다랐고, 이로 말미암아 클라이막스의 스릴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며 힘있게 에너지를 쏟아내는 순간들이 좋았다. 실험실에서 팔에 주사를 놓으려고 단단히 묶기 전에 살짝 헤매는 듯한 몸짓은 미소를 짓게 했고,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며 등장하던 장면은 은근히 소름이 돋았다. 루시의 방 안에서 소리없이 나타났을 땐 정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고. 



세련된 무대와 조명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도 다채로움을 더했다. 커튼콜에서 해나 루시의 머리를 쓰다듬고, 정화 엠마의 어깨를 다독이던 조지킬의 뒷모습도 멋졌다. 어퍼컷 엔딩 또한 쾌감을 전하며 기립박수를 완성시키는 피날레로 작용하며 깊은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다만, 이분법적 표현이란 말로 설명이 가능했던 엠마와 루시의 사회적 지위와 삶은 일말의 아쉬움과 아이러니를 남겼다. 소모되는 여성 캐릭터로의 활용에 그치고 말았으니. 여기에 더해 이 공연이 만 7세 이상 관람가라는 점도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첫 관람 때는 조지킬의 매력에만 푹 빠졌는데, 나이를 먹으며 세상을 살아가다 보니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와서 이로 인한 변화를 체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이 공연 같은 경우는 사실 처음과 달리 스토리보다는 배우의 연기를 보고 노래를 들으러 가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려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재관람을 하지 않았던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조지킬은 특히나 마지막 관람이라는 생각으로 다녀온 거였어서. 이걸로 만족을 하려고 한다. 자리 잡기도 힘들고, 다른 배우로 예매해 놓은 한 장만 보면 이 공연도 끝이다!


돌아올 때마다 이슈가 되는 극인 만큼,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에 출연하게 될 배우들은 앞으로도 역대급 캐스팅을 갱신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로 인해 티켓 값도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돼서 걱정이다. 오디 컴퍼니는 올해부터 이미 이 공연의 평일과 주말 티켓 가격을 달리 책정해 지불받고 있으니 말이다. 무려 만원 차이가 나는 데다가 할인율도 감소해서 여러 번 보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질 듯 하다.


작품 자체는 장점과 단점이 혼재하지만 배우들 만큼은 흠잡을 데 없으니, 한 번은 꼭 보고 넘어가도 괜찮을 거라고 본다. 그중에서도 조지킬은, 배우 조승우를 좋아하는 이들이 안 보면 섭섭할 수도. 결론은 "볼 수 있을 때 보자!"이긴 한데 이 마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그리하여, 이 공연 관람에 대한 나의 컨프롱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