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에쿠우스 :: 전박찬 알런에게 압도당하다
연극 <에쿠우스>를 막공주에 관람하러 다녀왔다. 궁금했던 전박찬 배우의 알런을 만나기 위하여. 이미 좋은 좌석은 다 빠져 나간 상태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사이트 예매창을 들락거리다 보니 중앙 블럭 앞열 한 자리가 뿅! 하고 눈에 띄어서 곧바로 결제를 완료했다.
결론적으로, 이날의 선택은 매우 훌륭했다. 그토록 간절히 기다렸던 최애 알런을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연극 <에쿠우스> 속 알런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소년에게서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완벽하게 압도당함으로써 숨죽여 이야기를 듣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일곱 마리 말의 눈을 찌른 17세 소년 알런 스트랑이 정신과 의사 마틴 다이사트를 만나게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인간 내면에 잠재된 욕망과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며 공연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열정을 잃어버린 채로 하루하루를 맥없이 살아가던 다이사트에게 오직 말만을 자신의 종교이자 신념으로 받든 채 살아온 알런의 개성은 마음 속 깊이 숨겨두었던 격정적인 감정에 불씨를 지피기에 충분했고, 극이 진행될수록 변화를 통해 반전을 꾀하는 둘의 상황이 흥미로웠다.
[CAST]
마틴 다이사트 : 장두이
알런 스트랑 : 전박찬
헤스터 살로만 : 차유경
프랭크 스트랑 : 유정기
도라 스트랑 : 이양숙
질 메이슨 : 심은우
젊은 기수 : 조형일
너제트 : 배은규
코러스 : 조형일, 이동훈, 신동찬,
이명규, 현익창, 김선진
알런이 조금씩 다이사트에게 진심을 내보임에 따라 사건의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모와의 관계, 말과의 추억, 질과의 데이트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표출되던 소년의 심리를 전박찬 배우가 매우 실감나게 표현해줘서 절로 알런에게 감정 이입이 됐다.
찬알런이 나타나자마자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음을 깨달았고 17세 소년 그 자체로 무대 위에 존재하는 그를 보게 된 순간,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공연은 무조건 레전각이자 기립각이라는 것을......느낌이 딱 왔다.
알런의 상처가 손에 만져질 것처럼 가까이 느껴졌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의 잔소리를 입모양으로 따라하며 분노를 보이던 모습과 생식의 구절을 에쿠우스에 빗대어 읊조릴 때 멜로디를 덧입혀 부드럽게 노래를 부르듯이 말하던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에쿠우스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손으로 허공에 알파벳 철자를 하나씩 써내려가던 순간도 신선했다.
헤스터와 다이사트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로 엿보이던 알런의 표정과 카세트에 대고 절규하던 아픈 외침, 너제트와 함께 할 때 숨소리마저 동화된 움직임 역시도 섬세하기 그지 없었다. 1막이 끝난 후 지속되는 암전 동안 박수 갈채가 끊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2막 후의 커튼콜 또한 마찬가지.
마냥 어렵게만 생각되었던 연극 <에쿠우스>를 예전보다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가능한 시간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찬알런으로 인해 다이사트처럼 내 안의 열정을 깨우고픈 간절함이 솟아났기에 더더욱.
게다가 이 작품 보면서 울게 될 줄은 몰랐기에 꽤나 충격적이기도 했다. 개성 대신에 정상과 비정성을 논하는 이들의 시선에 갇힌 알런과 내가 동일시되는 느낌을 받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이 취미가 됨에 따라 꽤 많은 공연을 봐왔다고 봐왔는데,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래간만이라 뿌듯했다. 특히, 연극을 보게 된 이후 처음 경험하는 짜릿함이었으므로 여운이 꽤 오래 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요런 재미를 자주 맞닥뜨릴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이루어진 연극 <에쿠우스>의 무대는 조명과의 어우러짐마저도 매력적이었다. 커튼콜에서 무대인사가 진행되는 동안 내리쬐던 푸른빛의 은은한 조명 한가운데 위치한 십자가의 위엄이 대단했다.
그리고 커튼콜이 끝나고 난 뒤, 텅 빈 무대에 자리잡은 조명의 빛깔은 공포감과 경이로움 사이의 감정을 겪게 함으로써 한참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공연의 막은 내렸지만, 알런을 감싼 것도 모자라 다이사트를 향해 휘몰아치던 에쿠우스의 존재감이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7마리의 말들로 역동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몸짓을 생생하게 살린 일곱 명의 배우들은 제 역할을 다했다. 이와 함께 젊은 기수 역으로 분한 조형일 배우의 풋풋함이 좋았고, 배은규 배우의 너제트는 소리 없이 강한 이끌림을 선사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중에서도 1막 마지막 장면과 2막의 절정에서 보여지는 말들의 움직임은 사운드의 강렬함이 더해져 놀라움을 전하기에 충분했다. 눈 앞에서 말이 날뛰며 포효하는 장면의 카리스마도 상당했다.
알런과 다이사트를 만나게 함으로써 기대 이상의 결과를 확인하게 만든 차유경 배우의 헤스터 판사는 언제 봐도 멋졌다. 알런과 다이사트, 두 사람 모두를 위한 결단이 겪게 해준 사건의 해결은 곱씹어 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프랭크 스트랑 역의 유정기 배우와 도라 스트랑 역의 이양숙 배우는 자신들의 가치관만을 중요시해 알런에게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킨 부모로 고정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힌 캐릭터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좋은 부모가 되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음을 일깨워주는 극이기도 했다.
올해 공연에선 질과 알런이 함께 손을 잡고 인사하는 커튼콜이 추가돼서 이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질 메이슨 역의 심은우 배우는 굉장히 도발적이면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로, 대사를 칠 때의 목소리와 눈빛으로 말을 건네는 연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까지 만나 본 질 메이슨 중에서 가장 매혹적이었다고나 할까?
자신이 일하는 마굿간에 알런을 데려와 말을 손질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줄 때 서로의 몸이 예기치 않게 닿음으로 인해 눈을 뜨게 되던 열망에 달뜬 모습이 선명하게 와닿았다. 뿐만 아니라 서로를 향한 터치의 은밀함과 그 안에서 비롯된 눈빛의 반짝임은 질과 알런, 알런과 말의 대비를 불러 일으켜 흥미로웠다.
여기에 더해, 질과 알런의 마굿간씬에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비추던 조명의 아름다움 또한 기억에 남는다.
맨발의 투혼을 확실하게 보여준 찬알런. 그가 보여준 알런의 시간을 오래도록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잊지 못하는 것이 맞는 거겠지.
질과 알런이 서로 마주보며 웃는 장면이 예뻤는데, 초점 맞추기에 실패해서 올리지 못하는 게 아쉽다. 하지만 뭐, 현장에서 그 순간을 직접 확인했으니까 된 걸로.
장두이 배우의 다이사트는 알런을 통해 자신의 현재를 돌아보며 눈물을 쏟아내던 장면이 감명깊게 다가왔다. 오랜 세월동안 감춰둔 채 살아와야 했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일 곳이 없어 슬퍼하던 찰나에서 느껴지던 후회가 뇌리에 박힌 채 잊혀지지 않았다.
딕션과 더불어 대사 실수가 몇번 있었던 건 아쉬웠지만, 새로운 다이사트를 마주하게 되었기에 반가움이 더 앞섰던 시간이기도 했다. 알런을 치료하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소년으로 인해 위로받고 각성하게 되는 모습이 보여져서 좋았다.
조금씩 진심을 내보이게 된 둘이 환자와 의사가 아니라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다이사트가 장난을 쳤을 때, 그의 다리에 매달리던 알런의 목소리가 굉장히 애처롭게 들려왔다. 알런을 치료하는 거였지만, 다이사트 또한 감화되고 있었음에 달라질 모습이 절로 상상이 갔다.
결론적으로 공연 안에서 알런과 다이사트로 주고 받는 대화가 전하던 삶의 의미는,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새로운 길을 제시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고도 남았다.
전박찬 배우는 연기천재가 분명하다. 어쩜 그렇게 17세 소년과의 싱크로율이 완벽한지! 목소리에서 전해져 오던 소년다움과 눈에 보이는 비주얼의 조화로움이 환상적이었으며, 입체적인 감정표현 역시도 최고였다. 담요를 부여잡은 채로 고뇌하는 다이사트 옆에서 미소를 짓던 장면은 섬뜩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전달하며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연 후의 커튼콜에선 이렇게나 화사한 미소를 보이며 또다른 의미로 심장을 부여잡게 했다. 찬알런에 대한 찬사의 이유를 직접 실감할 수 있었던 공연이었기에 관람의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던 날이었다. 때마침 커튼콜 촬영까지 가능해서 이렇게나 예쁜 모습을 담게 되었으니, 어찌 좋지 않을 수 있겠나 싶다.
연극 <에쿠우스>를 더 이상 관람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생각했던 지난 날의 나를 반성하며, 최애 알런으로 자리잡은 전박찬 알런과 만났던 날의 공연을 소중하게 간직하려고 한다.
이 공연을 맞닥뜨렸을 때, 내 안에 존재하게 된 에쿠우스는 오직 찬알런이었다. 요 한 문장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는 그날의 공연이었다. 연극 <에쿠우스>의 전박찬 알런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다.